[기자수첩]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보여준 ‘부실선거’…선관위가 키운 불신의 정치

정치

이데일리,

2026년 6월 04일, 오후 07:30

4일 오전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앞에서 시민들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항의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이데일리 안소현 기자] 6·3 지방선거가 마무리됐지만 정치적 갈등의 불씨는 아직 남아있다. 개표 결과보다 더 큰 후폭풍은 선거 당일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앞에서 벌어졌다.

4일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와 황교안 전 국무총리, 일부 보수 성향 인사들은 밤새 선관위 앞에 모여 “선거 무효”를 외쳤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근거로 전국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찰 추산 최대 1200여명이 모였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부정선거론자들의 주장과 맞물려 이들에게 무대를 열어줬다. “부정선거 입법독재”라는 플래카드가 휘날리고, 성조기와 태극기를 든 극우 성향 시민들이 모였다.

이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실만으로 이번 선거를 ‘부정선거’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실제 법조계에서도 선거관리상 위법 소지는 있을 수 있지만 선거 무효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부정선거론’ 자체보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선관위를 믿지 못하게 됐느냐는 점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서울 송파·강남·광진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송파구 일부 투표소는 유권자의 절반 수준만큼만 투표용지를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시민들은 긴 줄을 서고도 투표를 하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인 투표에서조차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다.

사실 선관위를 향한 불신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2020년 총선 이후 반복된 부정선거 논란, 2022년 대선 사전투표 관리 부실 논란, 채용 비리 의혹, 가족 특혜 채용 문제, 그리고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까지. 선관위는 그때마다 “선거 결과에는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정작 국민들이 느끼는 불신은 해소하지 못했다.

선관위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부실하게 관리된 선거가 ‘부정’ 선거라는 증거는 없어서다. 그러나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두루뭉술한 해명이 아닌, 자신의 소중한 한 표가 제대로 행사됐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공정함과 신뢰도다.

그 확신을 만드는 것이 선관위의 역할이다. 하지만 선관위는 이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부실하게 선거를 관리해 정치 양극화를 더욱 부추겼다.

선관위가 허술한 관리로 논란을 만들면 한쪽에서는 부정선거 음모론이 확산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비웃는다. 결국 선거 결과를 둘러싼 불신과 증오만 남는다.

민주주의는 선거 결과를 승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승복의 전제는 선거 관리 기관에 대한 신뢰다. 신뢰를 잃은 선거는 결과가 아무리 공정해도 의심받는다.

독일 베를린은 2021년 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 부족과 관리 부실 문제가 발생하자 결국 선거를 다시 치렀다. 우리와 제도는 다르지만 최소한 선거 관리 실패에 대한 책임만큼은 분명히 물었다.

반면 한국의 선관위는 논란이 터질 때마다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답변으로 책임을 회피해 왔다.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문제삼고 있다. 전날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심야에 중앙선관위를 항의 방문해 “이것(투표용지 부족)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며 이미 선거 자체가 심각하게 오염됐기 때문에 재선거를 실시해야 하는 사안”이라며 “이 정도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으면 선관위원 전원이 사퇴하거나 탄핵 사유”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당장 개표 중단을 촉구했지만 선관위는 재선거 사유가 아니라며 개표를 이어갔다. 장 위원장은 격앙된 얼굴로 노태악 선거관리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와 별다른 소득이 없자 “선거무효소송을 준비 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국민들은 법 조항을 묻는 것이 아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묻고 있다. 선관위는 스스로 쌓아온 무능과 안일함으로 결국 국민적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국민의 적폐가 됐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만이 아니다. 반복되는 부실 관리와 책임 없는 대응 역시 민주주의를 갉아먹는다.

선관위가 바뀌지 않는다면, 다음 선거에서도 ‘부정선거’라는 단어는 다시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음모론자들이 아니라 국민 신뢰를 잃어버린 선관위 스스로에게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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