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의 첫 사극, 그를 ‘거장’이라 부르기 시작할지도 모르는 출발점일까 [홍동희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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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HN스포츠,

2026년 1월 26일, 오전 12:00

(MHN 홍동희 선임기자) 2026년 한국 영화계, 그중에서도 충무로의 시선이 한 작품에 쏠리고 있다. 바로 장항준 감독의 첫 번째 사극 연출작인 '왕과 사는 남자'다. 장항준이라는 이름은 지난 30여 년간 우리에게 꽤 친숙하면서도 독특한 존재였다. 90년대 후반 한국 코미디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각본가이자, 소시민들의 찌질하지만 사랑스러운 싸움을 그려낸 연출가. 그리고 대중들에겐 '신이 내린 꿀팔자', '김은희 작가의 남편'이라는 유쾌한 예능인으로 더 익숙한 사람.

하지만 그 웃음기 어린 얼굴 이면에는, 창작자로서의 집요함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필자는 장항준 감독의 영화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짚어보고, 그가 비극적 역사의 대명사인 '단종'을 소재로 선택했을 때 발생하는 묘한 충돌과 조화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영화 '라이터를 켜라'
영화 '라이터를 켜라'

 

#라이터를 켜던 백수에서 농구 코트의 패자들까지

장항준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려면 그가 처음 충무로에 발을 들였던 1990년대 말로 돌아가야 한다. '주유소 습격사건(1999)'의 각본가로 이름을 알린 그는 당시 IMF 외환위기로 우울했던 사회 분위기를 시원한 난장판으로 날려버렸다. 주유소를 턴 4명의 주인공은 거창한 혁명가가 아니라 사회에서 밀려난 루저들이었다. 장항준은 이들에게 마이크를 쥐여줌으로써 기성세대를 조롱하고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이는 훗날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미워할 수 없는 소시민' 캐릭터의 시작이었다.

2002년 연출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는 이런 그의 세계관을 가장 잘 보여준다. 주인공 허봉구(김승우 분)는 고작 300원짜리 일회용 라이터를 되찾기 위해 부산행 기차에 탄다. 거창한 정의감이나 세계 평화가 아닌, 지극히 사소한 내 물건을 지키려는 욕심이 거대한 테러 사건과 엮이며 벌어지는 소동극. 장항준은 여기서 "평범한 사람도 벼랑 끝에 몰리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오랜 공백 후 내놓은 스릴러 '기억의 밤(2017)'과 스포츠 드라마 '리바운드(2023)'에서도 이 기조는 이어진다. 장르만 바뀌었을 뿐, 그 안에는 여전히 시대의 아픔(IMF)과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약자들의 연대가 깔려 있었다. 특히 '리바운드'에서 보여준 오합지졸 농구부원들의 성장은, 그가 데뷔 때부터 천착해 온 '약자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한층 깊어졌음을 증명했다.

 

# 웃음기 뺀 첫 사극, '왕과 사는 남자'의 도발

그랬던 그가 신작 '왕과 사는 남자'에서는 웃음기를 싹 거뒀다. 조선 역사상 가장 슬픈 왕 단종과 그 곁을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제가 그렇게 가벼웠습니까?" 시사회장에서 던진 그의 농담 섞인 반문은, 역설적으로 그가 이번 영화를 얼마나 진지하게 대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1457년 강원도 영월 청령포를 배경으로 한다.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뺏기고 유배된 어린 단종(박지훈 분)과 그가 유배된 마을의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의 만남이 중심이다. 실록에 단 두 줄,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그 빈 공간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다.

장항준은 승자인 세조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패배한 왕 곁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정부에서 돈을 푼다고 성장이 되느냐"는 뼈 있는 비유를 들며, 거시적인 역사나 경제 논리보다 개인의 삶과 성장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이는 영화가 단순한 정치 드라마가 아닌, 짙은 휴먼 드라마임을 보여준다.

 

#유해진과 박지훈, 세대를 넘은 앙상블

이 영화의 일등 공신은 단연 배우 유해진이다. 그는 역사 속 충신 엄흥도를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지극히 현실적인 촌장으로 재해석했다. 이는 관객이 쉽게 감정이입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장항준식 소시민'의 변주다. 그러나 그는 결국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유해진은 그 심경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감독과 배우가 현장에서 '척하면 척' 통하는 호흡을 보여주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단종 역의 박지훈 역시 놀라운 발견이다. 폐위된 왕으로서의 무력감뿐만 아니라, 열일곱 소년으로서의 두려움과 성장을 동시에 보여준다. 유해진이 "눈빛만 봐도 감정이 올라왔다"고 했을 정도로, 대사 이상의 감정을 눈빛으로 전달하며 비극의 깊이를 더했다. 여기에 기존의 칠삭둥이 이미지를 벗고 압도적인 무인으로 변신한 한명회 역의 유지태, 단종을 끝까지 모신 나인을 압축한 캐릭터 매화 역의 전미도까지. 배우들의 앙상블은 구멍 없이 탄탄하다.

 

#실패한 정의를 향한 장항준 식 위로

'왕과 사는 남자'는 장항준의 세계관이 역사라는 거울을 만나 굴절되고 확장된 결과물이다. 그는 묻는다. "성공한 쿠데타가 정의가 되는 세상에서, 실패한 정의는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이 무거운 질문에 대한 장항준의 대답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엄흥도가 단종에게 건네는 따뜻한 밥 한 끼,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어 시신을 수습하는 투박한 손길 같은 것이다. 그는 앙상한 역사적 사실 위에 휴머니즘이라는 살을 붙여, 박제된 역사 인물을 우리 곁에서 숨 쉬는 '사람'으로 되살려냈다.

이 영화가 기대되는 진짜 이유는,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 역사를 본다는 점이다. 엄흥도는 대의명분보다 내 마을의 안위가 걱정되는 평범한 촌장이었다. 그런 그가 목숨을 걸고 의리를 지키게 되는 과정은, 영웅주의에 취한 사극이 줄 수 없는 묵직한 공감을 선사한다.

물론 흥행에 대한 부담감은 있다. 장항준 감독 스스로도 "요즘 영화계가 어렵다 보니 손익분기점만 넘겼으면 좋겠다"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잊혀진 패자들을 위한 진혼곡이자, 시대를 넘어 통하는 인간애에 대한 믿음이다.

장항준은 이제 단순히 '재밌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을 넘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이야기를 하는 감독'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의 첫 사극은 그 진화의 증거이자, 우리가 그를 '거장'이라 부르기 시작할지도 모르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번 한파에 장항준이 건네는 이 뜨거운 위로가 관객들의 마음에 닿기를 바란다.

 

사진=MHN DB,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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