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거장'의 한 장면(사진=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제의 첫 상영을 여는 개막작과 영화제 기간 각 작품의 상영에 앞서 관객과 만나는 공식 트레일러는, 흔들림과 실패를 새로운 가능성의 출발점으로 바라보는 올해의 슬로건 ‘F를 상상하다(Reimagining F)’를 서로 다른 영상 언어로 보여준다.
‘정거장’(The Station, 원제 Al Mahattah)은 내전이 격화되는 예멘의 한 마을에서 여성 전용 주유소를 운영하는 라얄과 그곳을 오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2026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경쟁 부문에 초청돼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작품이다.
라얄이 운영하는 주유소에는 ‘남성 금지, 무기 금지, 정치 금지’라는 세 가지 규칙이 있다. 그러나 전쟁터로 떠났던 언니가 비밀을 안고 돌아오고, 열두 살 남동생마저 소년병으로 강제 징집될 위기에 놓이면서 외부의 폭력이 주유소의 경계를 위협한다. 라얄과 언니, 주유소의 여성들은 남동생을 구하기 위해 위험하고도 기발한 계획을 세운다.
영화는 전쟁 속 여성을 수동적인 피해자로 그리는 대신, 삶의 공간을 지키고 서로를 구하기 위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내세운다. 서로 다른 생각과 조건을 지닌 여성들이 갈등 속에서도 공동의 위기에 맞서는 과정을 유머와 활력을 잃지 않는 시선으로 담아냈다
‘정거장’은 예멘 내전 당시 수도 사나에 실제로 생겨난 여성 전용 주유소에서 출발했다. 사라 이스하크 감독은 처음에는 이 공간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하고자 했으나, 촬영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안전을 고려해 극영화로 방향을 전환했다. 작품은 약 10년에 걸친 개발 끝에 완성됐으며, 2025년 베니스영화제 산업 프로그램 ‘파이널 컷 인 베니스’에서 베니스 비엔날레상을 받았다.
송효정 프로그래머는 개막작 선정 이유에 대해 “무거운 현실 속에서도 판단하고 행동하며 서로를 구하는 여성 공동체의 활력과 유머를 놓치지 않는 이 작품은 흔들림과 실패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올해의 슬로건 ‘F를 상상하다’와 맞닿아 있어 개막작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사라 이스하크는 예멘계 스코틀랜드 감독이자 각본가, 영화 교육자다. 2011년 예멘 혁명을 기록한 단편 다큐멘터리 ‘카라마에는 벽이 없다’로 제86회 아카데미영화상 최우수단편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오르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트레일러 '플리커'의 한 장면(사진=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미조 감독은 “영화의 탄생을 예고한 깜빡이는 그림은 매끄러움이 아닌 떨림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최초의 이미지였다”며 “‘플리커’를 통해 완벽을 요구하는 시대에 맞서는 보정되지 않은 얼굴과 통제되지 않는 감정, 실패할 자유를 지키려는 인간의 반격과 끝내 사라지지 않는 생명력을 그리고자 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정거장’이 전쟁의 폭력 속에서 여성들이 지켜낸 공간과 연대를 보여준다면, ‘플리커’는 인간의 흔들림과 감정을 오류로 판정하는 시스템에 맞선다. 영화제의 첫 상영과 매 상영의 첫 순간을 여는 두 작품은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그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관객에게 건넨다.
1997년 출범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여성 영화인의 발굴과 지원, 여성의 삶과 시선을 담은 다양한 영화의 소개를 통해 한국 영화계의 다양성을 확장해 왔다. 올해도 서로 다른 삶과 세계를 담은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새로운 목소리를 만나고, 서로의 경험을 상상하며 연대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을 마련한다.
제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내달 20일부터 26일까지 총 7일간 메가박스 신촌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최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