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톱클래스 선수가 지녀야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빠른 대처'다. 플랜A가 잘 통하지 않을 때, 상대가 예상보다 강할 때, 자신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나 부상이 발생했을 때 등등 애초 그려놓은 상황과 실제가 달라졌을 때 얼마나 빠르고 유연하게 대처하느냐는 그 선수의 레벨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다.
2026년 새해 첫 경기에서 홍역을 치른 안세영의 두 번째 경기는 그 '대처'가 빛난 경기다. 안세영을 향한 걱정은 부질없었다. 독기 품은 '셔틀콕 여제'는 무서울 정도였다.
안세영은 8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아시아타 아레나에서 열린 세계배드민턴연맹(BWF) 말레이시아 오픈 여자단식 16강에서 일본의 베테랑 오쿠하라 노조미(30·랭킹 30위)를 게임 스코어 2-0(21-17 21-7)으로 제압하고 8강에 진출했다. 이틀 전과 확 달라진, 우리가 원래 알고 있던 안세영이 돌아왔다.
안세영은 대회 첫날이던 6일 32강전에서 캐나다의 미셸 리를 만나 상당히 고전했다. 대회 전까지 안세영이 8전 8승 일방적 우위를 점하던 상대인데 9번째 만남은 달랐다.
안세영은 1게임 다소 몸이 풀리지 않은 듯 시종일관 2~3점차로 끌려갔다. 평소보다 실수가 많았다. 그래도 결국 뒤집겠지 기대했으나 결국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19-21로 첫 게임을 내줬다. 결과적으로 2, 3게임을 연속으로 따내며 역전승을 챙기기는 했으나 내내 주도권을 쥔 쪽은 미셸 리였다. 1시간14분 혈투로 인한 체력 손실까지, 불안한 출발이었다.
16강 오쿠하라와의 1게임에서도 안세영이 5-8, 9-13으로 끌려가자 다시 이틀 전 악몽이 떠올랐다. 경기를 중계하는 해설진 목소리에도 당황함이 묻어났다. 지켜보는 이들은 경직됐으나, 안세영은 빠르게 대처했다.
일반적인 운영에 오쿠하라가 여유 있게 대응한다는 것을 파악한 안세영은 보다 빠르고 과감한 공격으로 템포를 끌어올렸다. 상대 빈틈을 유발하기 위한 '정지 작업' 의도의 랠리를 줄이고 빠른 타이밍에 승부를 걸고자하는 모습이 잦았다. 이 대처가 적중했다.
16-15로 처음 리드를 잡은 안세영은 이후 고삐를 늦추지 않고 연속 득점을 올리며 21-17로 첫 게임을 마무리했다. 2게임은 압도적이었다. 분위기를 바꾼 안세영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선제 실점 후 무려 11점을 내리 획득, 11-1을 만들었을 때 이미 승부는 기울어졌다. 1게임 때 '해볼 만하다'던 표정을 짓던 오쿠하라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스코어가 많이 벌어졌을 때도 자비 없이 몰아치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안세영은 상대에게 작은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듯 끝까지 집중했다.
지난해 박주봉 배드민턴대표팀 감독은 "안세영을 만나는 상대들은 '어차피 질 수 있다'는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덤빈다. 패해도 잃을 것 없다는 자세로 임하니 안세영은 더 힘들다"고 분위기를 전한 바 있다. 32강 미셸 리, 16강에서 격돌한 오쿠하라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11승으로 역대 최다 타이기록을 세웠기에, 올해 안세영과 만나는 도전자들은 더더욱 '장렬하게 전사하겠다'는 각오로 나설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장기전으로 가면 뒷심 좋은 안세영을 넘기 어렵다. 경기 초반을 더더욱 조심해야하는 이유다.
올해 하반기부터 21점에서 15점제로 바뀌는 것이 확정적인 상황에서 안세영도 조금씩 빠른 시간 내 승부를 보기 위한 변화를 준비해야한다. 리드하고 있을 때, 승기를 잡았을 때 확실하게 매듭짓는 마무리 작업 보완도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1회전에서 겪은 '1시간14분' 혈투는 이번 대회는 물론 2026시즌 전체를 봐서도 의미 있는 고전이었다. 그 경기를 되새겨 빠르게 대처한 안세영의 능력도 높이 살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