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HN 박찬기 기자) 5천분의 1. 0.02%의 확률을 뚫고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기적을 썼던 팀이 딱 10년 만에 3부리그로 추락했다. 레스터 시티의 이야기다.
레스터는 지난 22일 잉글랜드 리그원(3부)으로의 강등이 확정됐다. 헐 시티와의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거두면서 리그 2경기를 남겨두고 맞이한 비극이었다.
현재 11승 15무 18패(승점 42)로 23위에 머무른 레스터와 잔류 마지노선인 21위 찰턴 애슬레틱(승점 50)과의 격차는 8점으로 남은 경기에서 전승을 거둔다고 해도 넘어설 수 없게 됐다.
공교롭게도 기적을 썼던 프리미어리그 우승 10주년에 벌어진 참사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레스터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내로라하는 강팀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바로 전 시즌, 내내 최하위에 머무르며 강등이 유력했으나 막바지 연승을 내달리며 간신히 잔류에 성공한 팀이 우승을 차지한 동화 같은 일화는 여전히 축구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역대 최고의 기적이다.
도박사들이 책정했던 레스터의 우승 확률은 5천분의 1. 이는 마이클 잭슨이 어딘가에 살아있을 확률, 네스 호의 괴물이 살고 있을 확률과 같은 수치다. 즉,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곧바로 이어진 다음 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 나선 레스터는 프리미어리그에서와 마찬가지로 돌풍을 일으키며 8강까지 올라갔다. 또 한 번 기적이 쓰여지는가 했으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스페인)에 패하며 첫 여정을 마감했다.
유럽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증명한 레스터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우승 주역이던 은골로 캉테, 리야드 마레즈, 대니 드링크워터 등의 선수들이 빅클럽으로 떠났고, 제이미 바디만이 최전방을 지켰다. 이후 제임스 매디슨, 유리 틸레만스, 켈레치 이헤나초 등 주목받던 재능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고, 하비 반스, 벤 칠웰, 키어넌 듀스버리-홀 등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아카데미에서 육성한 유스들이 올라왔다.
우승 다음 시즌에는 12위에 머물렀으나, 이후 두 시즌 연속 9위에 오르며 선전했고, 2019-20시즌부턴 두 시즌 연속 5위로 시즌을 마쳤다. 영국 내에선 일명 '빅6'를 위협할 새로운 다크호스의 등장이라고 평가했으며, 레스터는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 커뮤니티 실드 우승을 거머쥐며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비로소 추락이 시작됐다. 2022-23시즌 초반 부진이 계속해서 이어지며 좀처럼 반등하지 못했고, 겨울 이적시장에서 많은 돈을 지출하며 승부수를 띄웠다. 기존 구단이 지켜왔던 기조와는 다른, 눈앞의 위기를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고 결국 그 결과는 챔피언십(2부) 강등이었다.
강등의 대가는 참담했다. 매디슨, 틸레만스 등 에이스 역할을 하던 주축 선수들의 대거 이탈은 불가피했고, 선수단의 퀄리티는 눈에 띄게 낮아졌다.
하지만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했던가. 엔조 마레스카 감독을 선임한 레스터는 강등에도 팀을 떠나지 않고 여전히 건재함을 보인 레전드 바디를 필두로 탈 2부 수준을 선보이며 챔피언십을 정복, 우승을 차지하며 한 시즌 만에 다시 프리미어리그로 돌아왔다.
야심 차게 품었던 클럽 재건의 희망은 시즌 전부터 어그러졌다. 마레스카 감독이 돌연 첼시로 떠났고, 레스터는 예상 못 한 시나리오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스티브 쿠퍼 감독을 선임했으나, 이는 마레스카 감독의 구상에 맞춰진 레스터의 방향성에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고 또다시 추락을 거듭했다.
레스터는 약 12경기 만에 쿠퍼 감독을 경질했다. 이후 뤼트 판니스텔로이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으나, 이미 무너진 팀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결국 승격 한 시즌 만에 곧바로 재강등을 당하는 대굴욕을 겪었다.
올 시즌을 앞두고 레스터는 단연 승격 1순위 후보로 꼽혔다. 바디가 떠났을 뿐, 프리미어리그에서의 스쿼드가 거의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 하지만 탈 2부 수준의 전력에도, 경기력을 그렇지 못했다. 마르티 시푸엔테스 감독 체제에서도 최악의 부진이 이어졌고, 초반을 제외하곤 줄곧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또다시 경질의 칼을 빼 들었으나, 재기는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프리미어리그로부터 승점 6점 삭감 징계 조치까지 취해졌다.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고, 하위권에 처져있던 순위는 강등권으로 곤두박질쳤다.
선수들의 의지는 바닥을 쳤고, 승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어느덧 승격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됐고, 이제 와서 엉켜있는 실타래를 풀기란 불가능했다.
2026-27시즌. 10년 전,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기적을 썼던 레스터는 3부리그에서 뛴다.
사진=스카이스포츠, Match of the Day, 게티이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