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스포츠에 삽입된 ‘강요된 열정’에 대하여 [스포츠리터치]

스포츠

이데일리,

2026년 5월 16일, 오후 06:37

이데일리가 대한민국 스포츠의 미래를 고민합니다. 젊고 유망한 연구자들이 현장의 문제를 날카롭게 진단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합니다. 변화의 목소리가 만드는 스포츠의 밝은 내일을 칼럼에서 만나보세요.[편집자 주]

[김현정 칼럼니스트] 주말 아침, 지역 스포츠 클럽이나 학교 운동장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모습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인 풍경이 됐다. 지·덕·체의 균형을 표방하는 전인교육의 수사(修辭) 속에서 스포츠는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 반드시 포함돼야 할 ‘표준 매뉴얼’처럼 받아들여진다.

안드레 애거시 자서전 '오픈'.
대부분의 학부모와 교육자는 이러한 신체적 경험이 아이의 건강과 인성, 사회성을 함양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 정온한 풍경의 뒤에는 한 가지 본질적인 질문이 생략돼 있다. 운동장 위에서 숨을 몰아쉬는 아이들이 과연 자신의 의지로 그곳에 서 있는가다.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명분은 때로 아이의 주체성을 소외시키는 구조적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기성세대가 설계한 촘촘한 경로 안에서 스포츠는 자발적 유희의 영역을 벗어나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제나 전략적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

이러한 성취 중심적 훈육이 개인의 내면에 남기는 실존적 괴리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바로 평생을 테니스 황제로 군림했던 안드레 애거시의 기록, ‘오픈(Open)’이다.

그는 자서전 첫 페이지에서 ‘나는 테니스를 증오한다’라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투척한다. 그의 서사를 따라 가다보면 이 고백은 우리 사회가 당연시해온 유소년 스포츠의 정당성에 대한 무거운 질문으로 다가온다. 그의 목소리는 성공이라는 결과값이 과정의 강압을 상쇄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우리가 구축한 스포츠 문화의 단면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스포츠는 아이의 운동장인가, 부모의 프로젝트인가. 이미지=AI 생성
◇스포츠는 아이의 선택인가, 부모의 전략인가

오늘날 유소년 스포츠 시장의 팽창은 아이들의 자발적 요구보다 성인 세대의 기획에 의해 움직이는 경향이 짙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체육 분야 사교육비 총액은 약 1조7000억 원 규모로 전년 대비 13.6%라는 가파른 증가율을 기록했다. 이는 국어·영어 등 일반 교과 사교육비 증가율(2.8%)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예체능 사교육 시장 전체의 성장을 사실상 체육 분야가 견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태권도와 수영, 축구와 농구로 이어지는 이른바 ‘스포츠 큐레이션’은 아이의 발달 단계에 맞춰 부모가 구매하는 필수 교육 서비스로 자리 잡았다. 부모들은 이러한 투자가 아이의 신체적 발달뿐만 아니라 공동체 의식과 인내심을 길러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기저를 들여다보면 건강·인성·스펙이라는 단어들이 철저히 부모와 교육자의 관점에서 정의된 언어임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아이의 몸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주체가 아닌, 부모의 전략이 투사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아이가 스포츠 현장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감각적 즐거움을 얻는지보다 해당 활동이 향후 성장에 어떤 효율적인 데이터로 남을 것인가가 우선시된다.

그 결과, 아이들의 스포츠 경험은 능동적인 탐색이 아니라 어른들이 정교하게 설계한 성장 가도의 일부가 된다. 애거시가 어린 시절 마주했던 ‘드래곤’이라는 머신이 기계적 압박이었다면, 지금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아이의 미래’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더 부드럽지만 촘촘한 구속이다.

◇전인교육이란 말 뒤에 가려진 도구화된 신체

유소년 스포츠는 ‘지·덕·체의 균형’ 혹은 ‘전인교육’이라는 말 뒤에 숨은 일종의 전략적 선택지가 되었다. 부모들은 건강과 인성, 나아가 입시 스펙을 위해 아이들을 축구 아카데미와 수영장으로 보낸다. 여기서 말하는 건강과 인성은 아이의 언어가 아니라 철저히 어른의 언어다. 아이가 신체 활동을 통해 느끼는 원초적 즐거움과 신체적 자유보다 그 활동이 장차 아이의 사회적 자산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가 먼저 계산된다. 아이의 신체는 더 이상 실존의 중심이 아니라 사회적 성취를 위해 관리돼야 할 부수적 자원으로 전락한 양상이다.

이는 한국 교육의 고질적인 모순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제도 교육 내에서 체육은 여전히 입시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 이는 통계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 국민생활체육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13~18세)의 규칙적 체육 활동 참여율은 상급 학교로 진학할수록 급격히 하락한다. 특히 중학교(55.4%)에서 고등학교(47.4%)로 넘어가는 시기의 신체 활동 부재는 공교육이 표방하는 ‘전인교육’이 취약헌자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학교에서 거세된 ‘몸의 교육’을 사교육 시장이 대체하면서 스포츠는 자발적 유희의 지위를 잃고 부모에 의해 세밀하게 기획된 ‘성장 매뉴얼’의 일부가 되었다. 교육 과정에서는 체육을 주변화하면서도 사적 영역에서는 고비용을 들여 체육을 ‘구매’하는 이 기이한 구조는 아이의 몸을 오직 성취를 위한 도구로만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의 발로다. 전인교육의 가치가 강조될수록 정작 아이의 몸은 주체성을 잃고 소외되는 ‘신체의 도구적 전락’을 목도하게 된다.

◇훈육으로 미화된 폭력과 ‘세이프 스포츠’의 당위성

애거시의 자서전을 보면서 내내 불편했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자행한 가학적 훈련방식이었다. 애거시가 세계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 폭력적 훈육은 ‘지독한 부성애’ 혹은 ‘철저한 지도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다,

이는 스포츠계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폭력의 미화 방식다. 가족이나 지도자가 가하는 정서적·신체적 압박이 ‘승리’라는 보상을 획득하는 순간 그 과정의 고통은 ‘승리 DNA’를 형성하기 위한 인고의 시간으로 둔갑한다. 최근 국제 스포츠계는 ‘세이프 스포츠(Safe Sport)’와 ‘세이프가딩(Safeguarding)’ 정책을 통해 아동의 정서적 안전과 인권을 법제화하려고 한다. 이는 더 이상 성취가 과정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하는 인본주의적 결단이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이 구축 중인 아동 중심 스포츠 환경은 스포츠 경험의 주권을 아이에게 되돌려주는 과정이다. 스포츠는 교실의 관념적 지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조우해야 한다. 타인과 협력, 정당한 경쟁, 실패의 수용과 회복을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목적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 결코 타인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구화되어서는 안 된다.

애거시는 코트 위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서 있는지를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회복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급한 것은 ‘기획된 승리’가 아니라 ‘선택된 유희’를 보장받는 일이다.

◇누구를 위한 ‘오픈’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아이들에게 스포츠를 권유하는가. 더 좋은 시설과 유능한 코치를 수소문하기에 앞서 아이의 눈을 응시하며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수행하는 이 훈련이 아이에게 자발적 성장의 기회인지, 아니면 어른들에 의해 설계된 가혹한 과제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스포츠를 통한 전인교육의 완성은 아이가 자신의 몸을 온전히 통제하고, 그 활동 속에서 자아를 발견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안드레 애거시의 자서전 제목인 ‘오픈(Open)’은 폐쇄적인 엘리트 체육 시스템과 부모의 독단적 설계 아래 갇혀 있던 아이들의 숨구멍을 열어젖히는 메타포다. 이는 개별 가정의 선택을 넘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스포츠 문화에 대한 정책적 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스포츠 경험이 ‘드래곤’과 처절한 사투가 되어선 안된다. 자신의 신체와 세계를 긍정하며 즐기는 축제가 될 때 비로소 스포츠는 교육으로서의 실존적 정당성을 획득할 것이다. 최후의 승자는 자기 삶의 주관자로서 운동장을 달리는 아이다.

김현정 칼럼니스트. 한국외대에서 문화콘텐츠학 박사 수료 후 현재 작은 이야기 발전쇼 대표, 한국 과학창의재단 사이언스타임즈 기자, 한국스포츠과학원 공동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스포츠 콘텐츠 비평, 스포츠를 통한 국제교류, 스포츠 주제의 미디어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 더 스파크(The SPARC)는 스포츠 정책 연구를 위해 모인 신진 연구자 그룹입니다. 젊은 연구자들이 모여 스포츠와 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탐구하며, 새로운 정책 대안을 모색합니다. 이 그룹은 학문적 연구와 현장의 경험을 연결해 미래 지향적인 스포츠 정책 담론을 만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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