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속에도 축구는 멈추지 않았다'...52년 만에 돌아온 아이티의 월드컵

스포츠

이데일리,

2026년 6월 14일, 오후 02:04

[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52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돌아온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가 아쉬운 패배 속에서도 결과 이상의 뜨거운 메시지를 남겼다.

아이티는 14일(이하 한국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폭스버러의 보스턴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이티와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C조 1차전에서 0-1로 패했다.

스코틀랜드와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를 치른 아이티 선수들이 경기 후 관중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있다. 사진=AP PHOTO
결과만 보면 실망스러운 경기였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유럽의 복병 스코틀랜드와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 오히려 볼 점유율은 53.8%대46.2%로 아이티가 앞섰다. 슈팅숫자도 15대9로 6개나 더 많았다. 득점 기대값(xG)도 아이티가 1.21대1.05로 스코틀랜드를 앞섰다. 다만 골 결정력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아이티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주눅 들지 않았다. 전반 초반부터 강하게 맞섰고, 빠른 역습으로 상대를 흔들었다. 몇 차례 결정적인 슈팅 기회도 만들었다. 한 골을 내준 뒤에도 마지막까지 동점골을 위해 투지를 불살랐다.

아이티의 월드컵 본선 출전은 1974년 서독 대회 이후 52년 만이다. 통산 두 번째 본선이다. 서반구 최빈국으로 묘사되는 인구 1200만명의 아이티는 2021년 조브넬 모이즈 당시 대통령이 피살된 국가 기능이 사실상 마비됐다. 갱단이 수도 포르투프랭스를 비롯해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국민들은 갱단의 폭력에 노출돼 하루하루 지옥같은 삶을 살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집을 떠나 피난 생활을 하는 인원이 130만명에 달한다.

축구 역시 정상적으로 운영될리 없었다. 아이티 대표팀은 최근 5년 동안 홈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A매치를 치렀던 국립경기장은 갱단에 점거됐다. 월드컵 지역예선 홈 경기는 800㎞ 떨어진 퀴라소에서 치러야 했다. 홈 경기 한번 없이 본선에 오른 사상 최초의 국가라는 웃지 못할 기록까지 세웠다.

대표팀 구성도 특수하다. 26명 중 상당수가 프랑스 등 해외에서 태어났다. 선수들은 15개국 25개 클럽에 흩어져 뛰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 출신의 세바스티앵 미녜 감독은 2024년 지휘봉을 잡았지만 정작 아이티 땅을 한 번도 직접 밟아보지 못했다.

그런 팀을 하나로 묶은 것은 전술이 아닌 책임감이었다. 어려운 상황의 나라에 작은 희망이라도 전해야 한다는 선수들의 투지가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같은 지역 강팀들을 제치고 월드컵 본선으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아이티 대표팀 최다 득점자인 뒤켄스 나종(에스테그랄 테헤란)은 “유니폼을 입는 것은 평범한 경기가 아니다. 우리는 최초의 흑인 독립국을 대표한다”고 했다.

아이티가 겪은 우여곡절은 대회 직전까지 이어졌다. 아이티 대표팀 유니폼에는 프랑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 1803년 베르티에르 전투 장면이 담겼다.

하지만 국제축구연맹(FIFA)은 정치적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며 착용을 금지했다. 아이티는 급히 해당 그림을 지운 단순한 디자인으로 유니폼을 바꿔야 했다. 아이티 측은 “정치적 의도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국민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해명했지만 규정 앞에서는 뜻을 접어야 했다.

유일한 아이티 리그 국내파 선수인 우덴스키 피에르(비올레트 AC)의 합류도 쉽지 않았다. 피에르는 미국 비자 발급이 늦어져 대표팀 합류가 지연됐다.

피에르는 아이티 내에서도 위험 지역으로 꼽히는 시테 솔레이에서 자랐다. 그의 소속팀은 월드컵 직전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전은 경기장 밖에서 들린 총성 때문에 시작이 늦어졌다.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아이티 축구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정치적 혼란에 지친 아이티 국민들에게 월드컵은 희망의 신호다. 2004년 브라질 대표팀이 아이티를 방문했을 때 포르토프랭스에서는 이틀간 총성이 멈추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아이티는 이번 월드컵에서 브라질과 같은 조에 묶였다.

아이티의 다음 상대는 브라질과 모로코다. 객관적인 전력 차는 크다. 하지만 아이티의 축구에 대한 열정과 정신은 점수판에 다 담기지 않는다. 총성 속에서도 공을 차고, 나라 밖에서 홈 경기를 치르며, 유니폼을 금지당해 새 유니폼을 입어야 했지만 그들은 같은 마음으로 그라운드를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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