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정 김려가 쓴 ‘우해이어보’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예부터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지만 이젠 달라졌다. 최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집계가 시작된 196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요즘 사람들은 한 끼에 평균 밥 반 공기 정도로 버티고 있다. 반면 돼지, 소, 닭고기 등 3대 육류 소비량은 지난해 기준 1인당 60.6㎏으로 쌀 소비량을 넘어섰다.
우리 경제의 산업화는 외식 산업의 발달과 함께 식생활의 서구화를 가져왔다. 20년 전만 해도 식탁에서 볼 수 없었던 브로콜리, 셀러리, 파프리카가 등장하고 식당에선 부대찌개, LA갈비와 같은 정체가 모호한 음식들이 팔리고 있다. 인스턴트 식품과 배달 음식의 소비도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 시대의 음식문화 발전에는 항상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은 새로운 식재료와 요리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즐기며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식기와 식탁예절을 도입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만든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때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 ‘우해이어보’ 편찬한 김려

담정 김려가 쓴 ‘우해이어보’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려는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같이 작은 배에 낚시 장비를 싣고 노를 저어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고기 잡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날마다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어류들을 구경하는 것만 즐겼다. 김려는 그중에서 채록할만한 것들의 형태와 색깔, 성질, 맛 등을 기록해 ‘우해이어보’를 만들었다.
우해는 진해의 다른 이름이고, 이어보는 특이한 어류만 모아놓은 책이라는 의미다. 책을 그렇게 편찬한 것은 김려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잉어, 상어, 방어, 민어, 오징어처럼 사람들이 흔히 아는 어류나 해마, 해우 등과 같이 어족과 관계없는 것들, 또 아주 작고 가치가 없어서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개체 등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해이어보’에 실린 어패류는 어류 53항목, 갑각류 8항목, 패류 11항목으로 총 72항목이다. 근연종 34종까지 합하면 전체 숫자는 총 106종에 이른다.
특별한 것은 ‘우산잡곡’이라 이름 붙인 한시 7언 절구 39수를 어류를 기록한 각 문항의 끄트머리에 군데군데 적어놓은 것이다. 한시의 내용은 남해 연안 어촌의 풍경과 어로 현장을 묘사하거나 어류의 유통과정과 주변 지역 여인들의 모습까지 노래하기도 해 자칫 딱딱해질 수도 있는 어보에 서정성 가득한 풍물지의 성격을 덧입혔다.
김려는 소싯적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는 1780년 15세 나이에 성균관 유생으로 들어가 1792년(정조 1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일성록에는 정조가 고시 부문에서 공동 수석을 차지한 그를 접견하고 “그대의 용모가 또한 청수한 것을 보니 글이 사람을 닮았다고 할 만하다”라고 말한 기록이 보인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요즘의 소설체와 유사한 문장, 패사소품체를 익혀 친구 김조순과 ‘우초속지’라는 패사소품집을 내기도 했다. 김조순은 훗날 순조의 장인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이 되는 인물이다. 김려는 절친 이옥과 함께 소품체 문장의 중심인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정조는 패사소품체를 혐오했다. 그는 글은 도를 실어 나르는 수단이라 생각했고 바른 정치는 바른 문장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정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문체 타락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하였는데 결국 그것을 빌미로 ‘문체반정’을 일으킨다. 문체반정이란 문체가 바른 곳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정조가 정통 고문이 아닌 패사소품체를 구사하는 문풍을 바로잡고자 한 것을 말한다.
문체반정으로 박지원은 반성문을 쓰도록 강요당했다. 이옥은 과거에 장원급제하고도 벼슬길이 막히고 군역에 두 번이나 처해지는 등 평생 고초를 겪었다. 훗날 김려는 끝까지 굴하지 않은 이옥의 유고 11종을 자신이 편집한 ‘담정총서’에 실어 후세에 전했다. 김려는 정조의 명에 따라 시를 지어 바치고 칭찬을 받으면서 문체반정을 피해갔다.
그는 악부시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1797년 강이천의 유언비어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그는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갔다가 얼마 후에 부령으로 옮겨졌고, 이어서 신유박해로 다시 경남 진해에 유배를 당한 것이었다.
◇생선 가공법은 물론 요리법과 어로법까지 소개해

볼락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우리나라 방언에 엷은 자주색을 보라라고 하는데, 보는 아름답다는 뜻이니 보라는 아름다운 비단이라는 말과 같다. 보라라는 물고기의 이름은 반드시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라며 어원에 대한 일가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거제도 사람들이 보라어 젓갈을 많이 담그는데, 그 맛은 조금 짭짤하면서도 달콤해 마치 쌀강정과 같다고 했다. 삼치알을 용란이라고 하는데 젓갈을 만들어도 맛이 좋고 말려 먹어도 맛있다고 했다. 전갱이 새끼로 추정되는 매갈을 소개하면서 맛이 담백하고 달며, 이것 역시 젓갈을 담그기에 아주 좋다고 했다.

대게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진해 사람들은 ‘문절망둑’을 많이 먹으면 잠을 잘 잔다고 했다는데 불면증에 시달리던 김려 자신도 죽을 끓여 먹고 회로도 먹었더니 꽤 효험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재미있는 것은 개불을 ‘해음경’이라 했는데, 그것을 깨끗이 말려서 잘게 갈아 젖과 섞어 위축된 생식기에 바르면 바로 발기한다고 했다. 비아그라가 없던 시절이다 보니 별걸 다 약재로 쓴 모양인데 소개는 하지만 효과는 보증할 수 없다. 꼬막을 지칭한 ‘와농자’는 생리불순에 효력이 있다는 의서의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김려는 방어의 일종인 ‘양타’를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어뢰’(지금의 죽방렴)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또 가는 댓가지를 둥글게 엮어서 만든 통발로 문절망둑을 잡는 방법도 상세하게 묘사했다. 진해 사람들의 차례상에는 산해진미가 많이 올라가지만, 그중에서도 귀한 ‘새우소라’를 맨 앞줄에 놓는다는 풍습도 이야기한다. 민어를 ‘녹표어’라 했는데 그 부레를 말려서 동래의 왜 시장에 몰래 내다 팔거나 자신들이 구워 먹는다고 했다. 서울의 상인들은 상대를 안 하는데 그 이유는 관가에서 세금을 매길까 두려워서라고 세태를 비꼬기도 한다.
‘우산잡곡’에는 유난히 여성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김려는 가난한 노파와 젊은 아낙에 대한 연민의 정을 드러내거나 남도 여인들의 강인한 생활력을 칭송하기도 한다. 밤이면 바닷가를 돌아다니는 문어를 파계승으로 오인하고 사립문을 열어주는 바람난 어촌 처녀의 일화도 나온다.
김려는 풍류남이었다. 그는 부령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의 기생 연희와 사랑에 빠졌는데 진해로 옮기고 나서도 그녀를 그리며 300수 가까운 시가 수록된 ‘사유악부’를 창작하기도 했다. 김려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10년 만인 1806년, 그가 41살 되던 해였다. 아들의 상소도 있었지만, 친구이자 당대의 세도가 김조순의 조력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 후 벼슬길에 올라 의금부를 시작으로 경기전령, 연산현감을 거쳐 함양군수로 재직 중이던 1822년에 56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그는 수많은 시와 ‘가수재전’, ‘삭낭자전’같은 전들도 남겼다.
근자에 와서 김려가 귀양살이를 했던 율티마을에서는 매년 ‘우해이어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창작 뮤지컬 ‘우해이어보’도 공연되었다. 그와 이옥의 우정과 삶을 다룬 책까지 200년 뒤에 출간되었으니 김려는 저승에서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