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이야기에서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둠이 잔잔히 내려앉은 무대 가운데, 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문은 평범하다. 색이며 모양새며 어디 하나 튀는 구석 없는 그저 그런 문이다. 그러나 화자는 이 문을 보며 그로테스크하다고 말한다. 런던의 밤거리를 걷다 보면 다섯 걸음에 한 번은 볼 법한 이 흔한 문이 어째서 그의 눈엔 기괴한 형상으로 보이는 것일까.
지킬 박사의 친구, 어터슨은 여느 날과 같이 깜깜한 길을 걷던 중 잔인한 폭력의 현장을 목도한다. 길에서 마주한 낯선 이를 무자비하게 찍어 누르던 사내의 모습은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악'이 드나드는 문, 그것이 그 문이 유독 기이하게 느껴졌을 이유일 것이다. 사건 뒤 마주한 지킬의 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어딘가 혼란스럽고 초조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어터슨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낀다. 연극은 범인의 정체, 그 순수한 악의 근원을 파고든다.

아마 '지킬앤하이드'처럼 오랜 시간 무대에서 사랑받아 온 작품도 드물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라는 둘도 없는 히트곡으로 대표되는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이리라. 지킬과 하이드,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이 고전 작품이 이토록 굳건히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 한 넘버가 주는 전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본성, 선과 악을 다루는 작품의 이야기는 모든 사람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관객들은 연극을 통해 무대에서 펼쳐지는 저 먼 세상 이야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
인간은 선하다. 그리고 악하다. 인간에게 악은 그렇게나 익숙하고 당연한 존재이다. 연극 '지킬앤하이드'는 이런 악의 평범성을 가감없이 드러내어 보여준다. 이토록 평범하고 무던해 보이는 사람이 가진 '악'에 대해서,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는 '악'의 존재에 대해서. 악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앞에 놓인 어떤 평범한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럼 악은 기꺼이 다가와 문 앞에 놓인 자를 감싸 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품 안에서 무한한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
연극 '지킬앤하이드'는 한 명의 퍼포머가 이끌어나가는 1인극이다. 2024년 초에 영국에서 초연을 올렸던 따끈따끈한 신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2025년 3월부터 초연 공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작품의 캐스팅에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정평이 난 최정원, 고훈정, 백석광, 강기둥 등 네 명의 배우가 이름을 올려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큰 기대를 안고 마주한 최정원 배우의 연극 '지킬앤하이드' 무대는 기대 이상, 그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최정원 배우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여유로움을 자유자재로 발산하며 무대를 누볐다. 자연스럽고 능글맞게 관객들과 소통하다가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극에 순식간에 몰입하는 모습이 실로 감탄스러웠다. 작품의 강, 약을 적절히 살려가며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능수능란한 연기력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무대 경험에서 쌓인 은은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비교적 무겁고 어두운 주제를 다루는 극인데도 최정원 배우의 다이나믹한 연기가 더해지니 전혀 지루하거나 쳐지는 느낌이 없이 보는 내내 흥미로웠다.
'지킬앤하이드'라고 하면 모두가 흔히 알고 있는 고전적인 인상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연극 '지킬앤하이드'는 딱딱한 고전, 그 이상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새로운 작품이다. 준비가 되었다면 문을 열고 이 작품이 선사하는 새로운 충격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아마 상상했던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악의 근원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한편, 연극 '지킬앤하이드'는 대학로 TOM 2관에서 오는 5월 6일까지 공연된다.
글, 문화칼럼니스트 강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