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유롭스키 &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여홍일의 감성, 클래식美학]

생활/문화

MHN스포츠,

2025년 5월 09일, 오후 04:50

세대 교체된 지휘자의 활력이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연주력에 대한 새 이미지를 갖게 만든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10년만의 올해 내한연주회였다. (사진은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올해 내한연주회를 지휘하고 있는 러시아 출신의 유롭스키)
세대 교체된 지휘자의 활력이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연주력에 대한 새 이미지를 갖게 만든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10년만의 올해 내한연주회였다. (사진은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올해 내한연주회를 지휘하고 있는 러시아 출신의 유롭스키)
 

2025년 5월 3일(토)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베를린 방송교향악단(Rundfunk-Sinfonieorchester Berlin·RSB)의 10년 만의 내한 공연으로 가득 찼다. 무대 조명이 켜지고 블라디미르 유롭스키(1972생)가 길고 날렵한 팔 동작으로 첫 박자를 끊자, 관객석 전체가 숨을 들이켠 채 오케스트라의 첫 음을 맞이했다.

2015년 3월 13일, 같은 장소에서 지휘봉을 잡았던 마렉 야노프스키(당시 76세)는 독일적 중후함과 정확성을 앞세워 브람스 교향곡 2번을 들려줬다.

기립 박수로 맞이했던 그날의 기억은 크지만, 음향은 넓었으되 온기가 부족했고 목관이 부드럽게 이어져야 할 곳에서 약간의 공백이 느껴졌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RSB가 ‘베를린 사운드’의 깊이를 증명하기엔 2% 모자랐던 밤이었다.

꽉 찬 에너지와 옹골찬 바이올니즘을 보여준 대만계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협연장면. 
꽉 찬 에너지와 옹골찬 바이올니즘을 보여준 대만계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협연장면. 

 

10년이 흐른 2025년, 유롭스키는 같은 악단에 완전히 다른 표정을 입혔다. 첫 곡 브람스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 56a에서부터 현악 트레몰로는 투명했고, 호른은 단단하게 떠받쳤다. 필자가 2015년엔 “안정적이지만 보수적”이라 느꼈던 앙상블이, 올해는 “견고하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 변모했다. 곳곳의 템포 루바토가 과하지 않게 배치돼 변주마다 색채가 명확히 갈렸다.

이어 무대에 오른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1990생)은 꽉 찬 활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열었다. 1악장 카덴차에서 그는 조급함 대신 넉넉한 호흡을 택해, 중음 현의 저음까지 깔끔히 들려줬다. 오케스트라는 지나치게 물러서지 않고 관현악적 직조감을 유지해 독주자와 대등하게 호흡했다.

2악장에서의 오보에 오블리가토는 둥글면서 맑았고, 3악장에선 첸 특유의 탄력적인 리코셰 보잉이 무대를 종횡으로 가르며 에너지를 증폭시켰다. 연주가 끝나자 첸은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관객과 눈을 맞췄고, 이 친근한 제스처는 홀의 열기를 한층 끌어올렸다.

 

휴식 후 들려준 메인 레퍼토리는 브람스 〈교향곡 1번〉. 유롭스키는 도입부 팀파니의 전진음을 과도하게 부풀리지 않고, 대신 관악을 최소로 눌러 끈적한 긴장감을 만들었다.

2악장 안단테 소스테누토에서는 클라리넷이 숨 고르듯 여백을 살려 선율을 띄웠고, 콘트라베이스는 잔향을 짧게 정리해 음들이 번지지 않도록 받쳐줬다. 4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에서는 유롭스키가 큼직한 팔 동작으로 돌고래처럼 솟구치는 현악 선율을 그려 보이며, 15년간 런던 필하모닉을 단련시켰던 정밀한 리듬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눈에 띈 변화는 현악의 음색이다. 2015년엔 다소 건조했던 첼로와 비올라가 올해는 유연한 보잉으로 중음대를 풍성히 채웠다. 덕분에 4악장 코랄(베토벤 〈합창〉 주제의 변용)이 등장할 때, 관객은 ‘독일적 중후함’과 ‘유롭스키 특유의 투명함’이 동시에 교차하는 입체 음향을 체험했다. 목관은 밝은 톤으로 위를 열어 주고, 금관은 불필요한 과시를 자제해 균형을 지켰다.

유럽 오케스트라계는 최근 ‘젊은 피 수혈’이 두드러진다. 2021년 로열 필하모닉 음악감독에 오른 이는 키릴이 아닌 바실리 페트렌코(1976생)이고, 키릴 페트렌코(1972생)는 베를린 필을 이끌고 있다. 유롭스키 역시 같은 세대의 러시아 출신 지휘자로, 긴 호흡과 단단한 구조를 갖춘 해석으로 RSB를 또 한 단계 끌어올렸다. 10년 전 “베를린필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RSB가, 이제는 ‘독일 사운드의 또 다른 축’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키릴 페트렌코와 같은 1972년생인 러시아 출신의 블라디미르 유롭스키는 큰 키에서 뿜어져나오는 날렵한 지휘로 10년전에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에 가졌던 이 교향악단에 가졌던 미흡한 사운드의 아쉬움은 사라지도록 했다. 
키릴 페트렌코와 같은 1972년생인 러시아 출신의 블라디미르 유롭스키는 큰 키에서 뿜어져나오는 날렵한 지휘로 10년전에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에 가졌던 이 교향악단에 가졌던 미흡한 사운드의 아쉬움은 사라지도록 했다. 

 

공연이 끝난 뒤 2,000석을 가득 채운 관객은 약 3분간 기립 박수를 보냈다. 연주자들은 파트별로 일어나 감사를 표했고, 유롭스키는 악장과 함께 무대 전면에 서서 오른손을 가슴에 얹은 채 관객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2015년의 어딘지 가라앉아 있던 여운은 완전히 사라졌고, ‘세대 교체가 선사한 활력’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슬로건이 아님을 입증했다.

블라디미르 유롭스키와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은 10년 전의 정직하지만 다소 무난했던 사운드를 과감히 벗고, 촘촘한 질감과 생동하는 리듬으로 브람스를 재해석했다. 레이 첸의 직관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바이올린은 오케스트라의 변화를 극대화했고, 관객은 ‘새로운 베를린 사운드’가 펼치는 전율을 체감했다. 한마디로, RSB는 이제 베를린의 격전지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확실히 획득했다.

, 음악칼럼니스트 여 홍일 / 편집 주 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