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살리는 실낱 같은 빛...소설 '빛의 호위' (오늘의 책)

생활/문화

MHN스포츠,

2025년 5월 10일, 오전 06:00

(MHN 이나영 기자) 꾸준히 주목할 만한 국내 소설로 조해진의 소설집 '빛의 호위'를 소개한다. 

지난 2004년 등단한 조해진은 타자를 전심으로 응시하는 작업을 믿음직스럽게 이어나가고 있는 소설가. 신동엽문학상, 젊은작가상, 이효석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문단에 이름을 깊이 각인했다. 

지난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묶은 소설집 '빛의 호위'에는 "소외와 불안의 문제를 개인의 삶을 통해 포착"하며 "이 시대에 호응할 수 있는 문학적 상상력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환기한 작품"이라는 평과 함께 2016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단편 '산책자의 행복'을 포함해 총 9편의 작품이 묶였다. 단편 '빛의 호위' 이후의 이야기를 장편화한 소설 '빛과 멜로디'가 지난 2024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빛의 호위|조해진|창비

단편 '빛의 호위'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라고 말하며 소설집을 관통하는 표제작이다.

잡지사 기자인 화자는 인터뷰를 계기로 분쟁지역의 사진 기자인 권은을 만난다. 몇 차례의 만남 이후 화자는 초등학교 시절 반장이었던 자신이 담임교사의 권유로 가난한 방에 방치된 그녀를 방문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열세 살의 화자는 도움이 되고자 집에 있던 후지사 필름 카메라를 권은에게 선물했었다. 화자는 권은에게 처음으로 “카메라는 단순히 사진을 찍는 기계장치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임을 알려준 사람이었던 셈이다. "반장, 네가 준 카메라가 날 이미 살린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소설은 권은과 화자의 관계가 알마 마이어라는 유대인 여성이 겪은 관계로 연쇄되는 다층적 구조를 채택했다. "사람을 살리는" 위대한 일이 다른 시간선, 다른 공간 속에서도 반복되며 국경과 역사를 넘나든다. 조해진은 전쟁, 폭력, 가차없는 현실의 조건 속에서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살게 하는 순간을 카메라에서 섬광이 번쩍이는 마술적인 찰나와 같은 것으로 박제해낸다. 그런 때 우리가 사소하지만 위대한 빛의 호위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재일교표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소재로 삼은 '사물과의 작별', 동백림 사건이 연상되는 '동쪽의 숲', 중국인 제자가 답장 없는 과거의 스승에게 편지를 쓰는 '산책자의 행복' 등을 비롯해 '빛의 호위'에는 이민자, 유학생, 외국인, 입양인 등 이방인으로 규정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나와 나의 세계를 넘어선 인물들”로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소통”하며 때때로 서로에게 빛을 드리우고 유대를 맺는다. 조해진의 소설을 읽자면 타자를 살게 하는 한줄기의 빛을, 그 실낱 같은 희망을 믿게 될 것이다. 

책속에서

장이 작곡한 그 악보들은 식료품점 지하 창고에서 날마다 죽음만 생각하던 내게는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하는 빛이었어요. 그러니 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악보들이 날 살렸다고 말이에요. ▶'빛의 호위' 중에서

셔터를 누를 때 카메라 안에서 휙 지나가는 빛이 있거든. 그런 게 있어? 어디에서 온 빛인데? 내가 관심을 드러내자 권은은 그때까지 내가 한번도 본 적 없는, 한껏 신이 난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장롱 뒤나 책상 서랍 속, 아니면 빈 병 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얄팍하게 접혀 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라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그 황홀함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권은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기상점의 쇼윈도우에 반사되는 햇빛이 오직 그녀만을 비추고 있었다. ▶'빛의 호위' 중에서

실제로 유실물에는 저마다 흔적이 있고, 그 흔적은 어떤 이야기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나를 유혹할 때가 많다. (…) 엄밀히 말하면 그 이야기는 유실물을 사용한 누군가의 손때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누군가를 잃어버린 유실물은 선반의 고정된 자리에서 과거의 왕국을 홀로 지켜가는 것이다. 간혹 유실물에서 빛이 날 때가 있다. 일년 육개월이라는 보관기간을 채우고도 찾아오는 이가 없어 처리되기 직전, 홀연히 나타났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빛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한 개인에게 귀속되지 못하고 망각 속으로 침몰해야 하는 유실물이 세상에 보내오는 마지막 조난신호를 본 것 같은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일종의 상실감이었다. ▶'사물과의 작별' 중에서

사진=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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