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상 이 작품]길들여진 귀를 위한 변명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5년 7월 01일, 오전 06:01

[계희승 한양대 작곡과 교수] 음악을 듣는 일은 쉽지 않다. 여기에 클래식 작곡가가 살아있을 당시의 악기를 써서 연주하는 ‘고(古)음악’ 공연처럼 ‘원전연주’나 ‘시대악기’라는 전제가 붙기라도 하면 실망감에 발길을 돌리기 일쑤다.

지난 6월 6일과 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한화클래식 2025: 소프라노 파트리샤 프티봉과 아마릴리스 앙상블’ 공연 장면. (사진=한화클래식)
문제는 그 이유가 연주 때문인지, 아니면 나 때문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상을 불문하고 ‘원조’가 붙는 무엇인가에 만족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 내는 대신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해 손으로 빚어낸 음식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의 입맛에 맞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지난달 6일과 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한화클래식 2025: 소프라노 파트리샤 프티봉과 아마릴리스 앙상블’의 ‘마법사의 불꽃’ 연주가 그랬다. 일단 프로그램부터 난해하기 짝이 없다.

요약하면 한데 묶여 연주될 이유가 없는 여러 작곡가의 악곡들을 조합해 완성한 한 편의 유기적인 음악극. 물론 이러한 시도는 지금 우리에게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나름의 전통을 갖고 있기에 그 자체가 난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텍스트 중심, 서사 중심으로 연결된 악곡들이 ‘음악적’ 기승전결을 경험하게 해주는가는 다른 문제다.

지난 6월 6일과 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한화클래식 2025: 소프라노 파트리샤 프티봉과 아마릴리스 앙상블’ 공연 장면. (사진=한화클래식)
필자가 찾은 8일 공연 기준으로 이야기하면 소프라노 파트리샤 프티봉의 목소리는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단체에서 리더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와 호흡하기 위해서였을까. 수시로 무대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바람에 반대쪽 객석에 자리한 이들은 그 아름다운 소리를 흘려보내야 했다. 적어도 1부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재정비하는 시간에 비슷한 피드백을 들은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자각한 것인지는 몰라도 2부에서 그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프로다.

여딩엔, 헤포코스키,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타루스킨 같은 음악학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는 옛 시대 방식으로 음악 듣는 법을 잊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불과 10년, 20년 전 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때가 있는 법인데, 100년, 200년, 그것도 바다 건너 유럽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 오랜 세월을 지나 여전히 향유된다는 사실 또한 놀라운 일이다.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고전’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좋은 음악, 특히 좋은 연주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는 사실을 되새기려는 것이다.

지난 6월 6일과 8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한화클래식 2025: 소프라노 파트리샤 프티봉과 아마릴리스 앙상블’ 공연 장면. (사진=한화클래식)
그러니까 아마릴리스의 연주가 난해하게 다가왔다면 그건 아마도 그들이 아니라 온전히 내 탓일 가능성이 높다. 차갑고 날카로운 현대적 소리와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칼군무’에 길든 나의 ‘무뎌진’ 귀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합주’가 만족스럽지 않았을지언정 가르쳐준 게 있다면 내가 ‘틀렸을’ 가능성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 가장 중요한 가치를 이 오래된 음악을 통해 배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들의 연주가 계속될 이유는 충분하다. 성찰의 순간을 선물한 한화클래식과 주관사 제이에스바흐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사족 하나. 앙코르 두 곡 중 마지막은 ‘아리랑’이었다. 프티봉의 목소리로 듣는 아리랑이라니. 객석에서는 마침내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박수는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 문득 어느 고급 음식점에서 옆자리 손님이 디저트를 뜨며 남긴 말이 떠오른다. “오늘 먹은 것 중에 이게 제일 맛있네요.” 셰프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비밀에 부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