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제 셰프
봉골레파스타에는 계절마다 수급이 가능한 조개류를 쓰지만 바지락이 빠지지 않는다. 바지락에는 속은 검은 펄로 가득 찼지만 겉보기는 멀쩡한 것이 들어가 있다. 이런 가짜 조개를 솎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아주 가끔 골라내지 못한 펄조개가 한창 볶고 있는 봉골레에서 터지기도 한다. 그날 조개 손질 당번은 변명이 통하지 않았다.
조개 손질 일이 떨어지면 하나씩 조개를 스티로폼 박스 안에 던져 보거나 고무장갑을 끼고 조개끼리 빨래하듯 문질러야 한다. 이때 펄이 든 조개가 벌어지면 마치 상한 흙냄새가 났다. 가끔 육수 안에서 펄 바지락이 열리면 아무리 고운 천으로 걸러도 소용이 없었다.
바지락. (뉴스1DB) © News1
상한 바지락을 가득 채운 펄 골라내기
바지락 선별이 어려워도 다른 조개를 쉽게 쓰지 못하는 건 맛 때문이다. 특유의 깔끔한 감칠맛으로 육수를 뽑아내면 파스타의 맛을 끌어 올린다. 모시나 홍합 육수도 써보지만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바지락 맛은 깨끗한 갯벌 환경이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
연휴에 순천만 갯벌을 향해 가면서도 내 맘속에는 썩어 있는 진흙 덩어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검은 갯벌이 펼쳐졌다. 장비를 갖추고 한발씩 들어가 보았다. 푹푹 빠지는 발을 도와 저절로 양손이 허우적거린다.
손에 쥐어진 펄에 나도 모르게 코를 가져가 보았다. 아무런 냄새도 없이 청량했다. 더 깊이 파보아도 맑은 바다 기운만 느껴졌다. 내가 주방에서 느꼈던 시궁창 냄새는 온데간데없었다.
검은 덩어리를 자세히 보면 넘치는 생명의 활기가 가득하다. 조심스레 진흙을 파고 있는 칠게에서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점프하는 망둑어가 보인다. 펄을 하나 가득 파보아도 신선한 바다향이 느껴진다.
갯벌에는 깨끗한 바다향이 가득
갯벌은 빠지면 걷기도 힘들어 뻘배를 타고 이동한다. 펄에서 이동하면서 짐도 옮기는 뻘배는 마치 서프보드를 진흙에서 타는 것과 같다. 무릎을 뻘배의 한쪽에 대면 진흙과의 마찰로 상할 수 있어 수건을 둥글게 감아 공간을 만든다. 다른 한 발로는 펄을 밀고 나간다.
허기를 달래려고 들어간 가게에서 간단한 잔치국수를 먹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바지락을 데쳐내고 속에 들어간 펄을 씻어내고 있었다. 가끔 해감이 덜 된 바지락을 데칠 땐 이렇게 벌어진 조개를 씻어내기도 한다.
20년 전 보길도에 갔던 때가 생각났다. 돈이 궁한 청년 시절이라 밥을 때우러 들어간 바닷가 식당에서 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식당 앞에는 빨간 물통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바지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여기에 산소 호수를 연결해 놓았는데 가끔 바지락은 시원하게 물줄기를 쏘아 올렸다. 식당 벽에 메뉴로 바지락 초회가 붙어 있었다. 이때 먹어보지 못한 바지락 초회에 아쉬움이 가득하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백사마을 주민들이 마을 앞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고 있다. (강진군 제공) /뉴스1
남도 갯벌의 별미 바지락
바지락은 기후 변화에 점점 구하기 어려워졌다. 예전에 보던 살이 실한 바지락은 고사하고 작은 크기의 국내산도 드물어 중국산을 쓰기도 했다. 1989년 8만 4000톤에 달하던 생산량은 2024년 2만 톤 정도로 줄었다.
가파르게 자취를 감추는 바지락과 달리 칠게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갯벌에 여기저기 빠르게 구멍을 파고 이동하거나 펄 사이에 숨어 있다. 손으로 잡는 칠게는 체력이 쉽게 지치기 마련이다. 어민들은 바닷물이 빠지는 간조를 이용해 그물로 잡는다. 갯벌에 V자 모양의 그물을 설치하고 밀물에 밀려온 칠게는 썰물에 나가면서 V자 끝에 설치된 그물에 모이게 된다.
칠게는 여전히 갯벌을 지키고 있어
칠게는 통으로 먹거나 갈아서 칠게장를 담근다. 시장에 가면 주로 튀겨서 주전부리로 먹을 수 있다. 반찬가게에서는 보통 간장게장 방식으로 담거나 칠게와 각종 양념을 갈아서 비벼 먹는 칠게장을 만들어 판다.
칠게장을 팔고 있는 업체에서는 약간의 이물감이 있을 수 있다는 문구를 붙여 놓았다. 감칠맛으로 가득한 젓갈이라 각종 한정식 상차림에도 조금씩 맛볼 수 있다.
칠게장을 구입하면 뜨거운 밥에 비벼 먹어도 좋다. 잘 구운 삼겹살에 칠게장을 찍어 양파무침이나 양파김치와 먹어도 별미라고 한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맛의 조합에 군침이 돈다.
요즘 갑자기 기온이 10도 아래로 떨어졌다. 신선한 갯벌 가기는 힘들어도 음식으로 간접경험은 가능하다. 오랜만에 동네 바지락 칼국숫집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싶다. 시원한 바지락 육수는 찬바람에 움츠린 우리에게 주는 작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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