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박명성 신시컴퍼니 예술감독이 예종석의 파워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그는 현재 공연계의 대부로 통하지만 과거에는 무대를 누비는 배우를 꿈꿨다. 그런데 진한 사투리는 늘 걸림돌이었다.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광주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에서도 사투리를 쓰잖아요. 교과서를 소리 내 읽어도 자연스럽게 사투리가 배어 나왔죠. 대학로 극단에 들어가 대본연습을 하는데 하루는 선생님이 ‘너는 그만 읽어’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읽었더니 ‘야 하여튼 너는 그만해’라고 했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사투리를 고쳐봤지만 주요 배역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단역으로 몇 작품을 했습니다.”
그는 배우생활을 접고 연출, 제작자로 변신을 거듭했다. 제작비 50억원을 투입한 블록버스터급 창작을 만들었다가 쫄딱 망하기도 했지만 맘마미아, 시카고, 아이다 등처럼 국내 최대 흥행 뮤지컬 5편 중 3편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버텼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언제부터 이쪽 일을 하고 싶었나.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배우를 꿈꿨다. 고교 때 국어 선생님 덕분이었다. 신예 작가였던 선생님을 통해 연극에 대한 매력을 깊이 느끼게 됐다. 연고도 없이 배우라는 꿈만 가지고 서울 대학로에 올라왔다. 숙식을 모두 극단에서 해결하며 지냈다. 한겨울에 온기라곤 석유곤로가 전부였다. 손에 쥐는 것이 없었지만 행복했다.
1983년 동인극단 작품 ‘여자의 방’이 데뷔작이었다. 김갑수씨가 주인공을 맡았다. 내가 대부분 맡은 역이 단역 중에서도 정말 작은 역할이었다. 무대에 나가서 3분 이상 머물러본 적이 없다. 대개는 뒤에서 앙상블로 춤을 추거나 등장하자마자 칼을 맞고 죽거나 하는 역할이었다.(웃음)
행복했지만 서른넷에야 연봉으로 100만원을 받을 정도로 생활이 녹록지 않았다. 더는 꿈만으론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해 고향으로 내려가기도 여러 번 했다. 해남까지 가면 아예 못 올라올 거 같아 목포 유달산에 올라 ‘연극을 떠나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런데 생활이 열악해도 다른 일을 하면선 행복하지 않을 거 같아 다시 대학로를 찾았다. 그렇게 버틴 게 지금까지 온 것 같다.
-배우에서 연출, 제작자로 변신한 이유는.
△조연출만 13년을 했다. 그러면서 극단 살림까지 맡게 됐고, 극단 총무, 기획 역할까지 확대됐다. 당시에는 프로듀서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였다. 신시가 뮤지컬을 만들며 그때 처음 프로듀서라는 호칭을 붙이게 됐다.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정식 라이선스 계약 후 국내 최초로 국내에 들여왔다.
△외환위기 때 뉴욕 브로드웨이에 갔다. 공연 중인 뮤지컬 네 편을 본 뒤 ‘더 라이프’를 들여와야겠다고 결심했다. 1980년대 뉴욕 뒷골목 사창가 사람들의 사랑과 배신을 다룬 작품이다. 그때까지 정식 계약을 하고 들여온 작품이 하나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나씩 풀어갔다. 억대 제작비가 없어 여기저기 돈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어렵게 제작비를 맞추고 대학 동기인 허준호에게 포주역을 맡겼다. 전수경과 이영자가 처음으로 뮤지컬에 도전해 화제를 낳았다.
예종석(왼쪽) 대기자와 박명성 예술감독이 대담을 하고 있다. 배경이된 그림은 임남훈 작가가 그린 박명성 감독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박명성 감독의 명함에도 새겨져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당시 한국 뮤지컬 시장이 앞으로 어느 정도까지 갈지에 대한 기대치만 있었을 뿐, 확실성이 없었다. 하지만 런던이나 뉴욕의 세계적인 명품 뮤지컬을 하나하나 한국에 소개해야만 작품마다 관객 저변이 확대될 것으로 봤다. 이후 ‘렌트’, ‘카바레’라는 작품을 연이어 라이선스 계약했고 흥행에 성공했다. 그리고 대형 뮤지컬인 ‘맘마미아’, ‘아이다’, ‘시카고’, ‘빌리 엘리어트’, ‘마틸다’ 등도 들여와 성공했다. 이제껏 한 번도 실패한 경험이 없는 신시의 ‘5대 뮤지컬’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이다.
-제작비가 궁금하다.
△자주 무대에 올리는 작품이라도 제작비는 (새 작품과) 똑같이 든다. 오히려 인건비가 계속 오르고 있기 때문에 부담은 는다. 무대 세트나 의상을 갖고 있어도 배우와 스태프들의 인건비는 계속 오르기 때문이다.
-해외 라이선스 비용은.
△요즘 뮤지컬의 경우 매출의 20%가 넘는다. 내가 처음 라이선스 작품을 들여오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 뮤지컬 시장이 형성되기 전이라 지금보다는 부담이 적었다.
-뮤지컬 티켓 고공행진에 대한 견해는.
△미국은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에 티켓값이 비쌀 수밖에 없지만 갑자기 가격을 올리는 것은 그 시장의 흐름과 질서를 역행하는 행위다. 시장에는 트렌드와 질서가 있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티켓값을 올리면 결국 실패한다. 한국도 현재 뮤지컬 티켓값이 20만원씩 하는데 16만원 정도를 적정선으로 보고 있다.
-티켓값을 올리는 것이 암표상을 근절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암표가 나올 정도로 흥행하는 공연은 1년에 한두 작품밖에 되지 않는다. 암표상이 성행할 정도의 공연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대형 뮤지컬이 매진되는 건 5년에 한두 작품에 불과하다. 한국의 뮤지컬 시장 규모와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연극과 창작 뮤지컬에 꾸준히 투자하는 이유는.
△요즘도 연간 뮤지컬 3편 연극 3편씩을 올린다. 뮤지컬은 1편을 올리면 500회 정도를 공연하는데, 1년에 1500회 정도 공연을 올리는 셈이다. 그렇게 뮤지컬에서 수익을 올리면 연극에 투자한다. 연극으로 수익을 남기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대학로 연극쟁이 출신이다. 돈이 될 것 같은 상업 뮤지컬만 해서는 프로듀서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시도하지 않고 두려워하는 혁신적인 작품에 도전하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공연 시장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는 연극과 뮤지컬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한다. 대극장 연극은 민간 컴퍼니에서 하기 어렵지만 내가 만든 라이선스 작품들의 힘을 바탕으로 1년에 한 편씩은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기초 순수 예술인 연극이 발전해야 뮤지컬 관객도 확대된다.
-어려움도 많았을 거 같다.
△초창기 흥행 실패로 대출과 투자를 받아야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도 많이 실패하다 보니 면역이 생겼다. 흥행에 실패해도 스트레스로 끝내지 않고, 반성하며 완성도 측면에서 간과한 부분들을 분석한다. 지금의 절망을 다음 성공의 발판으로 삼아 업그레이드하려는 희망으로 바꿔가는 습관이 생겼다. 이젠 스트레스도 잘 안 받는다. 공연하다가 빚이 생기면 ‘맘마미아’와 ‘시카고’ 공연을 올리면 된다는 정신으로 하고 있다. 실제 코로나19 때 진 100억원의 빚을 지난해 ‘시카고’ 재공연으로 모두 갚았다.
박명성 감독은 뮤지컬 외에도 연극 ‘레드’, ‘대학살의 신’, ‘렛미인’, ‘더 플레이 댓 고우즈 롱’ 등 해외 화제작과 ‘산불’, ‘푸르른 날에’,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 등 창작극을 고루 선보이며 기초예술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내가 속이 없어서 망해도 흥, 흥해도 흥이다.
-K-뮤지컬, K-연극이 세계 시장에 진출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K-공연 예술은 이제 시작 단계다. 영화, 게임, 드라마 같은 장르는 이미 세계 정상을 두드렸지만 연극, 뮤지컬 등 전통 공연 예술은 투자 유치가 쉽지 않은 열악한 환경이다. 우선 정부에서 순수 기초 예술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기초 예술은 정부 지원 없이는 살아남기 어렵다. 뮤지컬은 상업 장르이기에 자체적으로 제작 여건을 형성하고 있지만, 기초 예술이 탄탄해야 K-뮤지컬 등도 해외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우리 언어로 해외 진출하기가 쉽지 않다. 영상물이나 게임과 달리 공연은 자막이 관객들에게 쉽게 호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제는 젊은 프로듀서들이 보편성을 띤 스토리에 도전해야 한다. 세계 어느 나라 관객이든 공감하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스토리가 중요하다. 요즘 세계적인 트렌드는 유명 소설이나 영화처럼 인지도 있는 작품을 연극이나 뮤지컬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나도 런던의 예술가들과의 협업으로 작품을 완성해, 오리지널 프로듀서로서 해외에 진출하고 라이선스를 각 나라에 역수출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전 세계 시장에 도전하고 모험할 때다. K-컬처가 공연 분야까지 세계 정상에 선다면, 대한민국은 진정한 문화 강국으로 완성될 수 있다.
-서울과 지방 간의 공연 예술 격차가 심각하다.
△지방에도 퀄리티 높은 고급문화가 형성되면 그에 따른 문화층이 형성된다. 지역 간의 문화 격차 해소는 대한민국이 문화 강국이 되기 위한 가장 큰 숙제다. 문화 격차 때문에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오는데 지역에 좋은 문화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맘마미아’는 중소 도시까지 순회공연을 다 다닌다. 중소 도시일수록 유명 뮤지컬에 대한 욕구가 크다. 다만 민간 컴퍼니가 손해를 보면서 다닐 수는 없으므로 지자체가 좋은 공연을 유치하는 데 투자를 해야 한다. 지자체는 눈에 보이는 개발 사업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시민의 정서와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 유치에 경쟁적으로 나서야 한다. 문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지역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지역 축제 총감독을 맡고 있다.
△지역 축제나 행사는 오히려 서울에서의 작품 제작 업무에서 벗어나 즐거운 나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지역의 대표적인 스토리와 콘텐츠를 찾아내는 과정 자체가 나를 발전시키고 정서적으로 넓고 깊게 만든다. 콘텐츠를 발굴해 현실적으로 작품화하고 완성된 콘텐츠를 지역에서 만들었을 때의 쾌감과 희열이 크다. 일주일에 두 번은 지역을 왕래할 정도로 바쁘다. 하지만 지역 축제도 1년에 한 지역 이상은 맡지 않는다. 아이디어가 분산되는 것을 막고 집중력과 몰입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특히 지난 10월 나주 영산강축제에서는 천편일률적인 지역 축제의 형식을 과감하게 탈피하고 뮤지컬과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 축제의 격을 높이려 노력했다. 360도 회전 가능한 축제 주 무대를 꾸미고 매일 밤 ‘영산강 뮤직 페스티벌’을 열었다.
주제 공연으로 선보인 창작 뮤지컬 ‘왕후, 장화’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왕비인 나주 출신 장화왕후 이야기를 담았다. 영산강 물줄기를 배경으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재해석해 관람객의 큰 관심을 끌었다. 시민이 참여하고 소통하는 전통 마당놀이 형식과 뮤지컬의 융복합을 위해 원형무대를 만들었다. 52만명이 몰리는 등 많은 사람이 모여 흥이 나는 축제가 됐다.
-‘드림 프로듀서’, ‘이럴 줄 알았다’ 등 책도 여러권 출간했다.
△나는 전문적인 작가가 아니다. 책들은 작품을 만들 때마다 기록한 제작 노트를 후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내 생각을 덧붙여 펼쳐놓은 것이다. 예술 경영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표지판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선배들과 작업하며 얻은 경험, 후진들과 함께하며 느끼는 기대감 등 에피소드를 섞어 작품 만드는 과정을 담았다.
-대표, 감독, 교수 등 여러 직함 중 어떻게 불리고 싶나.
△나는 15년 전부터 신시컴퍼니 결제라인에서 빠졌다. 대표 자리도 30년 가까이 함께 일한 후진들에게 물려줬다. 컴퍼니가 내 대에서 끊기는 것을 막고 후진들을 양성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총괄 감독으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다.
-신시컴퍼니가 자랑하는 ‘응집력’과 ‘조직력’의 비결은.
△이직이 거의 없다. 대학 졸업 후 들어와 30년 넘게 일한 직원들도 있다. 회사가 아무리 어려워도 월급을 단 한 번도 미뤄본 적이 없다. 우리는 유일하게 투자를 받지 않는 컴퍼니다. 투자는 수익 창출이 목표이므로, 스타를 기용하는 등 작품성에 집중하기 어려운 요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품성 위주로 간다. 스타에 의존하면 생명이 짧다고 본다. 흥행은 작품이 좋으면 산에서 텐트를 치고 해도 관객이 모인다는 생각으로 전문 배우들을 통한 작품의 완성도에만 집중한다.
-나만의 행복은.
△세상을 즐기면서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게 어디있나. 고민한다고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되는대로 산다. 그런 사람이 계획적이고 맷집도 튼튼하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예술감독의 좌우명은 ‘가장 낮은 곳에서 먼 꿈을 꾸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연극쟁이’라고 칭하며 연극을 통해 배운 ‘가장 낮은 곳에서 다른 곳이 보이는 정신’이 담겨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