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질타하던 최고령 현역 화가…"예술에 완성 있나" [국현열화 35]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5년 11월 28일, 오전 07:40

김병기의 ‘가로수’(1956~1970). 한국 현대미술운동이 본격화하던 때, 초기 한국 추상화의 단면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검푸른 색으로 표현한 도로변 가로수가 작가 의지에 따라 추상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고 격정적 표현을 중시하는 앵포르멜적 화풍이 번지고 있었으나 작품은 오히려 그 경향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기하학적 화면 구성을 갖췄다.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를 전통적 방법으로 풀어내는 화풍을 정립한 작가는 특히 색채를 통해 상징적 의미를 즐겨 심어내곤 했다. 지난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Ⅰ’에 나왔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125.5×96㎝.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font> >

[정하윤 미술평론가] “바람이 일어나다 살아야 한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1871∼1945)의 시 한 구절을 자주 읊조렸다. 그 읊조림 그대로 바람이 거세게 불던 평생의 세월 동안 생에 대한 꺼지지 않는 의지를 그림에 담았다.

김병기(1916∼2022)의 어린 시절은 풍족했다. 평안도 대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교회와 미션스쿨, 극장이 있던 도시 평양에서 자랐다.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 김찬영(1893∼1960)의 영향이 컸다. 일본 도쿄미술학교 출신이자 한국 서양화 1세대 화가였던 김찬영은 섬세하고 낭만적인 정서를 담은 그림을 그렸고, 집에는 고희동(1886∼1965), 김관호(1890∼1959) 등 선구적 화가들이 드나들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린 김병기는 유화물감 냄새와 붓이 캔버스를 스치는 소리에 자연스레 익숙해져 갔다.

당시 김병기의 집에는 훗날 한국미술을 대표하게 될 또 한 사람인 이중섭(1916∼1956)도 자주 드나들었다. 평양 종로보통학교 같은 반이던 동갑내기 두 친구는 김찬영의 그림을 함께 바라보며 서양화의 꿈을 키웠다.

그림을 더 배우고 싶었던 18세의 김병기는 아버지 김찬영처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다녔던 도쿄미술학교 대신 젊은 화가들이 세운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를 선택했다. 전통적인 교육보다 새로운 현대미술의 흐름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당시 일본 미술계에서 주목받던 추상미술에 깊이 매료됐고 미술이론 연구에도 몰두했다. 비록 훗날 “일본에서 나만의 뚜렷한 화풍을 완전히 찾지는 못했다”고 회고했지만 이 시기는 분명 그가 화가로서 한층 성장할 수 있는 든든한 토대가 돼 줬다.

◇日 유학 중 연극 기웃거리다 아버지 불호령 “한우물 파라”

1936년에는 문화학원으로 옮겨 그림공부를 이어갔다. 유영국(1916∼2002)과 이중섭 등 한국 현대미술을 이끈 인물들이 거쳐 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였다. 당시 문화학원에서는 미술뿐 아니라 문학, 연극, 언어예술이 뒤섞인 새로운 창작이 활발히 이뤄졌다. 김병기는 다른 예술 장르에도 관심의 폭을 넓혀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으로 아버지 김찬영이 아들을 찾아왔다. 김병기는 학교의 연극무대에 참여하게 됐다며 들뜬 마음으로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김찬영은 화를 내며 한우물만 파라고 호되게 꾸짖었다. 자신은 잡지 출판과 영화에까지 손을 댔지만 정작 아들은 한길로 나아가길 바랐던 거다. 예술이란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비로소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김병기의 ‘숲과 정물’(1987). 초기 추상작업을 지나 형상·비형상이 공존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하단에 구상인 정물, 상단에 추상인 형체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지만 날카로운 선의 표현, 조화로운 색채의 활용 등에 일관성을 가져 전체적으로 이질감이 없다. 정물이란 일상 소재와 맞물린 작가의 추상화는 삶과 괴리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반영해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121.5×90.3㎝.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김병기는 평양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의 기쁨 속에서 그는 예술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고 믿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서 서기장으로 활동하며 흙으로 노동자의 상을 빚고, 500호가 넘는 대형 벽화를 그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술보다 이념이 앞서는 현실이 눈앞에 다가왔다. 자유롭게 그리고 싶다는 욕망은 점점 커졌고, 이내 평양 유지들이 서울로 전하는 밀서를 품고 홀로 1948년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하지만 이내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에는 전쟁의 흔적이 참혹했다. 좌우 이념으로 갈라진 화가들을 한데 묶으려 했지만 포화 속에서 전시회는 끝내 열리지 못했다. 부산으로 피란했을 때는 수중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가 어디선가 구해온 밀가루로 도넛을 굽고 그것을 거리에서 팔며 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김병기는 다시 붓을 잡았다. 종군화가단에 참여해 전장의 처절한 풍경을 기록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담는 일이 회화의 본질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김병기는 서울예고와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계기가 있었다. 1951년 봄 ‘타임’지에는 피카소의 ‘조선의 학살’이란 그림이 실린 일이다. 미군이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을 반전의 상징으로 봤지만 그는 달랐다. “예술이 선전의 도구가 되는 순간 진실을 잃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북쪽에서의 경험이 그를 남들보다 민감하게 만들었을 거다. 김병기는 ‘굿바이 피카소’라는 제목의 편지를 썼다. 현실을 부당하게 표현한 피카소의 그림을 비난하는 그 편지를 피카소에게 보내는 대신 그는 남포동 한 다방, 시인과 화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낭독했다. 그 소문을 들은 서울대에서 어느 날 연락이 왔다. “다방에서 예술론 하지 말고 교단에서 하시오”란 전갈이었다. 그렇게 그는 서울대 교단에서 한국미술의 기틀을 잡아가는 일에 몸을 담았다.

신문과 잡지를 통해 서양미술에 대한 글을 연재하며 비평활동도 병행했다. 1961년에는 제2회 파리비엔날레 커미셔너로, 1965년에는 상파울루비엔날레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다. 김병기는 한국 화단을 위해 다양한 방면에서 힘을 보탰다.

◇현실 담아내지만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는 추상화면

하지만 김병기의 본질은 언제나 화가였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림이었다. 학교와 화단의 여러 일을 맡으면서도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어가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광복 후 그린 대표작 ‘가로수’(1956∼1970)는 그가 추구한 예술의 방향을 잘 보여준다. 제목 그대로 길가에 앙상한 나무를 그린 것이지만, 색과 형태를 추상적으로 변형해 그 모습을 한 번에 알아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현실을 담되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는 것이 김병기가 원하던 방식이었다.

김병기의 ‘산 동쪽’(2018). 102세에 제작했다. 2010년대 후반 작업은 마스킹테이프를 붙여 만든 선으로 공간을 분할하며 자연을 추상화한 경향이 도드라진다. 작품에선 화면을 가로지르는 필선의 움직임으로 선 자체의 촉각성을 강조하면서 공간 아래 삼각형·사각형 등과 시각적 대비를 이루도록 했다. 몬드리안의 구성을 따르면서도 선과 여백, 오방색을 활용한 전통회화의 정신을 담아내고자 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130.2×162㎝.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가로수’에는 쓸쓸하고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전쟁의 상처로 모두가 아파하던 시기, 그 비통함을 나무의 형상에 담은 거다. 하지만 결코 절망적이지는 않다. 단단한 화면 구성을 통해 풍파를 견뎌내는 생명의 의지를 담았기에 그렇다. 이처럼 모진 현실 속에서도 생명을 붙들고 살아가려는 힘, 그것이 곧 김병기의 회화에 담긴 정신이었다.

광복 이후 줄곧 김병기는 사회적인 책무와 가장으로서의 책임, 그림에 더 깊이 몰입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갈등했다. 화단과 교직의 일은 한국미술과 가정을 위해 감당해야 할 몫이었지만, 전업 화가로서의 열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1965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참여를 계기로 삶의 많은 부분을 훌훌 털어버린 채 미국 뉴욕에 새 터전을 꾸렸다.

이후 김병기의 작업은 한층 자유로워졌다. 드로잉 같은 선이 두드러지고 색채는 더욱 다채로워졌다. 일상적인 정물화, 미국과 한국의 자연을 담은 풍경화 모두에서 현실을 그리면서도 색채와 선을 변형하며 화면을 추상화시켜 나갔다.

“난 장거리 선수, 예술에는 완성이 없다”라고 말하던 김병기는 103세에도 현역화가로 신작을 모아 개인전을 열 정도로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그 옛날 아버지의 “한우물만 파라”는 꾸짖음을 철저히 지킨 셈이었다. ‘살아 있는 한국미술사’로 불리던 그는 2022년, 10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최고령 현역 화가’란 타이틀을 남긴 채였다.

화가 김병기. 1965년에 미국 뉴욕으로 옮겨가 98세인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감각의 분할’을 계기로 귀국했다. 이후 103세에 개인전을 열고 106세 ‘국내 최고령 현역 작가’로 타계할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극심한 가난과 좌우 이념의 대립 등 김병기가 살아온 시절은 유난히 풍파가 거셌다. 그 거친 시대를 한 세기가 넘도록 화가로 버텨낸 그는 단 한번도 작품에의, 삶에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신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래서 우리는 김병기의 그림에서 색채나 형태를 넘어 수많은 굴곡에서도 자신의 길을 지켜낸 한 인간의 의지를 본다. “바람이 일어나다 살아야 한다”는 그의 읊조림은 이렇게 캔버스에 남아 우리 곁에 머문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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