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더더기 싹 덜어낸 무대… 한국연극의 중심 지켜내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2월 09일, 오전 06:02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김광보(62)는 인간의 고독과 사회의 부조리를 전면에 다루며 한국 연극계의 중심을 지켜온 연출가다. 1994년 ‘지상으로부터 20미터’로 데뷔한 그는 이후 극단 청우를 창단하며 활동 무대를 넓혔다. 지난 30여 년간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연출 세계를 구축해왔다. 이러한 작업 성과를 바탕으로 서울시극단과 국립극단 단장을 차례로 역임하며, 연극계 양대 공공극단을 모두 이끈 보기 드문 이력을 남겼다.

그의 연출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절제된 ‘미니멀리즘(군더더기를 덜어낸 무대)’이다. 그는 불필요한 장식과 설명을 과감히 걷어내고, 텍스트와 배우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사회의 모순과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 황승경 연극평론가는 “김광보 연출의 작품은 사회 속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삶과 관계의 균열을 집요하게 포착한다”며 “화려한 무대장치보다 배우의 몸짓과 침묵, 절제된 공간을 통해 감정을 깊이 전달하고 관객이 스스로 사유하게 만드는 연출가”라고 평했다.

김광보 연출(사진=이데일리 DB).
◇‘뙤약볕’으로 주목…‘그게 아닌데’로 정점

연출가 김광보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은 직접 대본을 쓴 ‘뙤약볕’(1998)이다. 수천 년간 말을 모셔온 섬마을의 사당과 당골(세습 무당)을 중심으로 신앙과 공동체의 균열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한국연극협회와 백상예술대상 신인연출상, 서울연극제 무대예술상을 받았다. 원작 소설 박상륭의 밀도 높은 서사를 원형무대라는 공간 구성과 배우 중심의 연출로 설득력 있게 무대화했다. 신인 연출가로서는 드물게 완성도와 실험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김광보의 연출 세계를 한 단계 끌어올린 작품은 ‘발자국 안에서’(2007)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변두리 쌀집을 무대로, 공간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그 속에서 소외되는 개인의 모습을 담았다. 살인의 공간을 ‘커다란 사회의 발자국’에 비유하며, 정해진 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반복적인 장면과 절제된 동선으로 그려냈다. 김광보 연출의 미니멀한 공간 활용과 상징적 연출이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꼽힌다.

연극 ‘그게 아닌데’(사진=연합뉴스).
‘그게 아닌데’(2012)는 김광보의 연출 역량이 집약된 작품이다. 동물원 조련사를 소재로 말이 오갈수록 오해가 쌓이는 관계의 아이러니를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풀어냈다. 김광보는 과장된 장치를 덜어내는 대신 배우의 언어와 침묵에 무게를 실었다. 이를 통해 인물 간의 팽팽한 갈등이 객석에 고스란히 전해지도록 연출했다. 주요 연극상 10개를 석권하며 2012년을 ‘김광보의 해’로 만든 작품으로, 그의 연출 커리어에서 정점을 이룬 작업이다.

‘사회의 기둥들’(2014)은 헨리크 입센의 원작을 동시대 한국 현실로 비춘 작품이다. 김광보는 점차 기울어지는 무대를 통해 위선과 음모, 탐욕으로 움직이는 ‘정상처럼 보이는 사회’를 조명했다. 140여 년 전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세월호 참사 당시의 한국 사회를 환기하며 의미 있는 울림을 남겼다. 무대를 살아 있는 은유로 활용해 우리 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투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말까지 단장으로 재임한 경기도극단에서는 ‘단명소녀 투쟁기’(2024)를 통해 삶의 고난과 생존의 문제를 다뤘다. 죽음을 피해 길을 떠난 소녀 ‘구수정’과 죽음을 찾아 나선 ‘이안’의 환상적인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개인의 운명처럼 보이는 죽음이 사회 시스템과 맞닿아 있음을 설화적으로 풀어내며 여운을 남겼다.

김 연출은 배우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하는 안목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서울시극단에서 함께 작업했던 배우 강신구는 “배우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 적재적소에 캐스팅을 한다”며 “작은 연기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인물의 이야기를 완성하도록 이끌어주는 스타일이라 현장에서의 신뢰가 두텁다”고 말했다.

연극 ‘사회의 기둥들’(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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