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상 이 작품]내 안·타인·세상의 벽…기막힌 인생살이

생활/문화

이데일리,

2026년 2월 10일, 오전 06:00

[류주연 연출·극단 산수유 대표] 연극 ‘벽이 서있다’(1월 20일~25일, 소극장 공유)는 극단 프로젝트아일랜드 단원들이 공동창작으로 만든 옴니버스 공연이다. 공연은 ‘시취’부터 ‘첫번째 조문객’까지 총 12개의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졌는데, 단원들이 직접 쓴 희곡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대체로 공동창작 공연은 완성도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수작이었다.

연극 ‘벽이 서 있다’ 중 에피소드 ‘시취’ 공연 사진. (사진=극단 프로젝트아일랜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청년이 저렴하지만 만족스러운 방을 찾는다. 하지만 전 세입자가 고독사로 죽은 탓에 아직 시체 썩은 내가 감돈다(시취). 그 방에서 죽어간 여인의 아들들이 엄마가 숨겨두고 죽었다는 돈을 찾아 방을 뒤진다(유산). 아랫집 남자는 물이 샌다며 윗집에 찾아와 확인하고 싶어한다(누수). 같은 회사에 지원한 두 친구 중 한 친구가 합격하고, 다른 친구는 떨어진다(내가 아니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온 남자눈 아내의 잔소리에 스트레스가 쌓인 남자의 수다를 듣는다(금요일). 한 작가는 실시간 채팅창을 열어두고 세상에 대한 혐오를 쏟아낸다(쓸모1). 한밤중 아파트 단지 내 주차된 트럭에서 경적 소리가 오랫동안 멈추지 않는다. 운전자는 죽어있다(경적). 실패한 작가는 자신의 책을 버리려 하지만, 뜻밖에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가 택배원으로 찾아온다(쓸모2). 형빈은 친구한테 받은 인형으로 자신이 저주에 걸렸다는 걸 무당의 도움으로 알게 된다(거미줄). 청각 장애인 소은은 특수학교에 가고 싶어 하지만, 엄마는 강해져야 한다며 소은이 일반 학교를 다닐 것을 주장한다(닿지 않는 말). 지현은 애인에게 ‘비혼식’ 청첩장을 준다(비혼식). 지현의 아버지는 한밤중 트럭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지현은 헤어진 지 15년이 지난 아버지의 장례식을 준비한다(첫번째 조문객).

12개 이야기를 간단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하지만 공연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된다. 평범하면서도 기발하고, 심각한데 웃기고, 진지하지만 엉뚱하다. 가볍지 않은 주제와 줄거리를 무겁지 않게 다루는 솜씨는 겸손하게까지 보일 지경이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서 때로는 지독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본질을 생각하게 하고, 비일상 속에서도 뼈저린 현실을 바라보게 해준다. 배우들은 주제를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쓰고, 연출은 각양각색으로 써진 작품에서 공통의 지점을 발견하여 ‘벽’이라는 은유로 묶었다고 한다. 그 결과물로 탄생한 ‘벽이 서있다’는 사람과 사회 사이의 벽,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 내 안의 벽을 고찰하게 하는 재미난 만물상 같은 작품이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단편들이 어느새 ‘현대인’이라는 커다란 표상으로 하나가 되어 떠오르는 느낌은 프로젝트아일랜드가 공연했던 ‘두 코리아의 통일’을 생각나게 한다. 옴니버스 공연에 대한 경험과 확신이 도움이 되었으리라. 한편 배우들은 대체로 자신이 쓴 글이 아닌 다른 배우가 쓴 글에서 등장한다. 거리두기와 자기객관화를 이루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며, 타인을 이해하고자 한 실질적인 노력이었다. ‘벽이 서있다’를 통해 창작의 과정마저 ‘벽’을 마주하고, ‘벽’을 부수어보려는 작품을 완성해낸 프로젝트아일랜드의 시도가 흥미롭다.

연극 ‘벽이 서 있다’ 에피소드 중 ‘금요일’ 공연 사진. (사진=극단 프로젝트아일랜드)
연극 ‘벽이 서 있다’ 에피소드 중 ‘비혼식’ 공연 사진. (사진=극단 프로젝트아일랜드)
연극 ‘벽이 서 있다’ 에피소드 중 ‘유산’ 공연 사진. (사진=극단 프로젝트아일랜드)
‘제24회 김상열연극상’ 수상자 류주연 연출. (사진=김상열연극사랑회)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