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 [김정한의 역사&오늘]

생활/문화

뉴스1,

2026년 2월 24일, 오전 06:00

후안 도밍고 페론(왼쪽)과 에바 페론 (출처: Numa Ayrinhac, 1948,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946년 2월 24일,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 복지부 장관 출신의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ón)이 승리했다. 이 선거는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는 역사적 분기점이 됐다.

페론의 승리를 견인한 핵심 동력은 빈곤 노동층이었다. 그는 군부 정권 시절 노동 정책을 통해 임금 인상과 유급 휴가를 실현하며 소외받던 대중의 우상이 됐다. 선거 기간 중 미국 대사 슈퍼를 브래든이 그를 나치 동조자로 비난하며 개입하자, 페론은 이를 '외세의 간섭'으로 규정하고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해 승기를 굳혔다.

당선 이후 페론은 국가 중심의 경제 통제와 파격적인 복지를 결합한 '페로니즘'을 본격화했다. 철도와 유틸리티를 국유화하고 수입 대체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영부인 에바 페론은 '성녀'로 추앙받으며 빈민 구제 사업을 주도, 페론 체제의 도덕적 지주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언론 통제라는 권위주의적 민낯을 드러내기도 했다.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다. 1952년 에바 페론의 사망은 정권의 상실감을 키웠고, 방만한 재정 지출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경제를 좀먹기 시작했다. 가톨릭교회와의 갈등까지 겹치며 결국 1955년 군부 쿠데타가 발생, 페론은 스페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페로니즘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18년간의 망명 생활 중에도 그는 아르헨티나 정치의 실질적 주인 노릇을 했다. 혼란에 빠진 아르헨티나는 1973년 그를 다시 대통령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노쇠한 지도자는 갈등을 봉합하지 못한 채 이듬해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페론은 아르헨티나에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는 노동자의 권익을 비약적으로 신장시킨 영웅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오늘날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의 씨앗인 '포퓰리즘'의 원조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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