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울대학교 구 본관. (출처: 국가유산청, KOGL Type 1 <https://www.kogl.or.kr/info/licenseType1.do>, via Wikimedia Commons)
1946년 8월 22일 미군정청은 군정법령 제102호로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을 공포했다. 일제 식민 잔재인 경성제국대학을 청산하고 흩어진 고등교육기관을 묶어 민주적 종합국립대학을 육성하겠다는 명분이었다.
경성제대 시설과 9개 전문학교를 통합한 거대 대학 출범은 해방 공간 최대의 교육 개혁이었으나 곧 거대한 화약고가 됐다. 통합 대상 학교 구성원들은 전통과 독립성이 말살된다며 반발했고, 미군정이 실권을 쥔 이사회와 미군 장교 해리 앤스테드의 초대 총장 임명에 지식인 사회는 '미국식 식민 교육의 시작'이라며 격분했다.
반발은 '국대안 반대 운동'으로 번졌다. 좌익 계열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개입하고 우익이 미군정을 옹호하며 맞서면서 학내 갈등은 좌우 이념 대립의 최전선으로 변모했다. 동맹휴학과 대규모 가두시위가 연일 이어졌고 캠퍼스는 최루탄과 경찰 곤봉으로 얼룩졌다.
미군정은 학생 수천 명을 제적하고 반대 교수를 대거 파면·해직하는 강경책을 폈다. 쫓겨난 학자와 학생들은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설립의 중추가 되거나 좌익 지하조직으로 흡수됐다. 민족의 지식 생태계가 남북으로 쪼개지는 비극적 분열의 시작이었다.
국대안 파동은 1947년 봄 미군정의 탄압과 우익 세력의 학원 장악으로 진압됐다. 군정청이 학칙 수정과 복학 조치로 수습에 나서면서 국립서울대는 수많은 갈등과 희생 끝에 단과대학 체제를 갖춘 최고 학부로 자리 잡았다.
국립서울대 설치령은 근대적 종합대학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자율성 억압과 분단 및 이념 대립을 격화시켰다는 상처를 남겼다. 국립서울대의 출발선에는 학문 독립과 민족적 자존을 둘러싼 치열한 투쟁의 역사가 깊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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