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기억의 흔적을 긁어내다"…이경성 '떨기나무-처음사랑' 展

생활/문화

뉴스1,

2026년 9월 03일, 오전 09:19

떨기나무-처음사랑(Thorn tree-First love) Fading Erosion Technique on Canvas (목판패널 위 소멸침식기법, 122x80.3cm, 2025년 (숨갤러리 제공)

캔버스 위에 물감을 덧칠해 형상을 완성하는 통상적인 그림 문법을 거꾸로 뒤집은 독창적인 전시가 열린다. 서양화가 이경성이 23일까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숨갤러리에서 25번째 개인전 '떨기나무-처음사랑'(Thorn tree–First love)을 펼친다.

이번 자리의 핵심 화두는 작가가 오랜 시간 다듬어 온 '소멸침식기법'이다. 먼저 밑바탕에 색과 모양을 완성한 다음, 그 위를 하얀색 층으로 두껍게 덮어버리고 다시 칼이나 도구로 긁어내 표면을 깎아낸다. 완전히 없애는 파괴가 아니라, 긁히고 깎이는 틈바구니 사이로 밑에 숨어 있던 옛 물감 자국이 희미하게 고개를 내밀도록 만드는 독특한 표현법이다.

이러한 제작 태도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양새와 빼닮았다. 세월이 흐르며 수많은 순간이 잊히고 흐려져도 마음속 깊은 곳에 남은 애틋한 감정은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경성은 전시를 앞두고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은 허무한 끝이 아니며, 지워지는 와중에도 끈질기게 버텨내는 기억과 사랑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진짜 증거"라고 설명했다. 종교적 상징으로 머물기 쉬운 떨기나무를 평범한 이웃들의 고단한 삶과 첫사랑의 순수함으로 치환해 낸 셈이다.

이경성이 깎아내고 지우며 도달한 화면은 관객에게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눈앞의 화려함을 걷어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잔상들이 잊고 지낸 가장 근본적인 것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2000년 첫걸음을 뗀 뒤 26년 동안 붓을 잡은 작가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자리도 준비된다. 12일 오후 4시에는 현장에서 관객과 마주 앉아 독특한 긁어내기 작업 과정과 작품 뒷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대화의 시간을 연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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