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당시 국가의 전쟁 능력은 방위산업은 물론이고 기계와 화학을 필두로 산업 전반의 역량이 정부를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었다. 독일의 산업은 그를 가능하게 했다. 지금이라면 전자와 IT가 추가될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국 측은 1차 대전 전후처리의 실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서독에 과도한 부담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마셜플랜으로 전후 부흥을 지원했다. 군비에 대한 규제도 없었다. 주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독일은 스스로 군비를 확충하지 않고 본격적인 재무장을 자제한 채로 최근까지 지내왔다. 통일 후에는 러시아와의 우호적 관계 설정에 올인했다.
독일 사람들은 빚지는 것도 싫어한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지금 있는 돈으로 감당해야 하고 가급적 빚을 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현대 독일경제의 근간이자 독일인들이 지켜온 원칙이다. 군비 지출은 거기에 차질을 가져온다.
그런데 그러던 독일이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지정학적 변화의 여파로 군비와 방위산업을 위해 빚을 내기로 했다. 헌법도 개정했다. 향후 10년간 1593조 원 규모다.
2025년 5월 6일 출범한 보수 기민당(CDU) 메르츠내각과 진보 야당 사민당(SPD)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제 독일 정부는 독일군 현대화를 위해 필요한 만큼의 국채를 발행할 수 있게 되는데 거대한 국방예산에 대한 지지의 대가로 사민당은 정부가 향후 10년간 약 797조 원 규모의 인프라 기금을 조성해 독일의 도로, 교량, 에너지, 통신망을 현대화한다는 계획을 성사시켰다. 사민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다.
인구 감소와 그로 인한 경제성장의 멈춤 등을 더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요즘 독일이 뉴스에 오르내리는 빈도가 높아졌다. 누가 말했듯이 독일이 뉴스에 자주 나오면 세상에 좋을 일이 없다. 그런데 지정학적으로는 러시아와 미국이 그 단초를 제공했다. 역사는 비슷하게 또 반복된다.
독일 최대의 방산기업은 라인메탈(Rheinmetall)이다. 뒤셀도르프에 있다. 독일제국 시기인 1889년에 창업했다. 1914년에 발발한 1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급성장했는데 종업원 수가 8000명에서 4만8000명으로 늘어났다. 전시이기는 했지만 지금의 3만1000명보다 많았다.
1차대전을 마감하면서 체결되었던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회사가 개편되어서 기관차, 농기구 등으로 생산 품목이 바뀌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제3제국이 출범하고 회사는 다시 무기 제조를 주력사업으로 하게 된다. 크루프(Krupp)에 이은 당시 독일 2대 방산기업이 되었다.
현재 라인메탈 주식의 66%가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의 소유다. 그런데 최근의 급격한 지정학적 변화로 라인메탈의 시가총액이 독일 대표기업 폭스바겐을 넘어섰다. 930억 달러로 RTX (레이시온), 하니웰, 사프란, 록히드마틴에 이은 글로벌 5위 방산기업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스웨덴의 사브,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모두 시총이 50% 이상 급등했다.
방위산업에 투자하는 것이 자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인식은 월남전 시기에 잠깐 나타났었다. 그러나 상대적인 평화의 시대가 지속되면서 ESG의 S조차도 ‘자본의 평화에 대한 기여’ 개념을 포함하지 않았다. ESG를 주도해 온 유럽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전쟁 발발 이래 모든 유럽 국가에서 평화에 대한 위협, 즉 사회 불안에 대한 잠재적 위험이 증가했지만 아직 산업정책이나 기업정책이 그에 본격적으로 반응하고 있지는 않다, 정부 주도의 전략이 논의되고 있는 정도다.
대량살상무기 개발이나 생산에 투자하는 행동은 ESG의 이념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재래식 군비에 기여하는 산업에 투자하는 것도 같은 범주의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후자는 향후 다른 평가를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서는 잇따른 총기사고의 여파로 가정용 호신 무기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엄격한 조건을 전제로 기관들의 투자 여지도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극단적인 환경 파괴와 인권 침해는 전쟁터와 전시 강점 지역에서 자행된 것이다. 전 세계적 ESG 조류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온 유럽이 지정학적 변혁에 이념적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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