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서 돈이 만들어진다면[생생확대경]

경제

이데일리,

2025년 7월 14일, 오전 05:00

[이데일리 장영은 기자] ‘허공에서 돈을 만든다,(money out of thin air)’ 실물 자산이나 생산 활동과 같은 실체적 근거 없이 통화가 새롭게 창출되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표현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지만 생각해 보면 원래 돈은 허공에서 만들어진다. 돈을 찍어 낼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국가가 중앙은행에 위임하면서, 강력한 법적·제도적 통제를 하는 이유다.

이자 장사를 한다고 노상 비판을 받는 시중 은행도 그렇다. 은행은 고객들의 예금을 기반으로 대출을 내주는 방식으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돈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시중 유동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이용자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은행은 당국의 엄격한 관리·감독을 받는다.

(이미지= 챗GPT)


최근 여당을 중심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디지털 혁신과 금융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 아래, 규제 완화와 진입장벽 하향이 혁신을 위한 필수 요건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이 화폐의 대체재 역할을 하는 데서 올 수 있는 문제점이나 무분별하게 허용할 경우 초래될 문제점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다.

19세기 미국에서는 규제가 미비한 환경에서 각 지역은행이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했다. 이른바 ‘와일드캣 뱅킹’(Wildcat Banking) 시대였다. 은행마다 신뢰도와 자산 건전성이 달랐고, 통화의 가치가 지역마다 달라 거래 불안과 신용경색, 대규모 뱅크런이 빈번히 발생했다. 결국 중앙은행의 통화독점과 강력한 규제, 예금자 보호장치가 도입되면서야 금융시스템이 안정화됐다.

스테이블코인은 다른 가상 자산과 달리 화폐의 성격이 강하다. 발행 주체가 충분한 자산을 보유하지 않거나, 신뢰할 수 있는 규제·감독 체계가 없다면 19세기 제도화하지 않은 민간 통화 발행이 야기한 미국의 혼란이 디지털 자산 시장에서 재현될 수 있다.

제대로 규제받지 않는 민간 스테이블코인 발행자는 사실상 ‘사설 화폐’를 발행하면서도, 허공에서 돈을 만들어내는 데 따른 ‘시뇨리지’(통화 발행 이익)를 얻는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공공에 환원되지 않는 반면, 위험은 이용자와 전체 금융시스템에 전가될 수 있다. 실제로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도 발행 주체의 불투명한 자산운용, 유동성 위기, 투자자 보호 미비 등 다양한 문제가 반복적으로 드러났다.

현재 국내외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실질적 결제·송금 수요보다는 투기적 거래와 ‘디지털 혁신’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의해 과열되는 모습이다. 설문조사에서도 스테이블코인 이용 목적이 실물경제 결제보다는 암호자산 투자·차익거래에 집중돼 있음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수요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무분별한 발행이 허용될 경우, 실물경제와 금융시스템에 불필요한 리스크만 키울 수 있다.

오늘날 화폐 제도의 핵심은 신뢰다. 만원으로 언제 어디서든 1만원짜리 물건을 살 수 있다는 당연함, 은행 잔고에 100만원이 있으면 언제든 실제 돈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 경제의 밑단을 지지한다.

과거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허공에서 돈을 만드는 것’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그 대가는 사회 전체가 치르게 된다.

이시간 주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