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 백화점에서 개점을 기다리는 시민들이 줄을 서 있다. (사진=뉴시스)
롯데백화점도 최상위층 선별에 힘을 실었다. 최상위 등급 ‘에비뉴엘 블랙’을 ‘상위 777명’으로 한정해 희소성을 강화했다. 또 기존 5000만원 이상 ‘에비뉴엘 퍼플’과 1억원 이상 ‘에비뉴엘 에메랄드’ 사이에 8000만원 이상 ‘에비뉴엘 사파이어’를 신설했다. 에메랄드 기준도 1억원에서 1억 200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고액 소비층 내부에서도 다시 한 번 서열을 나누는 구조다. VIP 포인트로 이용할 수 있는 호텔·파인다이닝·승마 등 경험형 콘텐츠도 확대했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 2024년 대규모 개편을 단행한 뒤 큰 틀을 유지하고 있다. 연간 매출 상위 999명을 선정하는 ‘트리니티’가 최상위 등급이며, 그 아래 1억 2000만원 이상 ‘블랙 다이아몬드’, 7000만원 이상 ‘다이아몬드’ 등 7개 등급 체계를 이어간다. 다만 1000만원 이상 등급인 ‘블랙’의 명칭을 ‘에메랄드’로 바꿨다. 현재 트리니티 커트라인은 연 구매액 2억~3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백화점들이 VIP 상위 기준과 구간을 확대하는 배경에는 ‘큰손 의존도’ 심화가 꼽힌다. 대표적으로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VIP 매출 비중은 2024년 45%에서 지난해 52%를 넘어섰다. 롯데백화점도 2020년 35%에서 2024년 45%까지 증가했다. 전체 소비가 둔화하는 와중에도 억 단위 결제를 아끼지 않는 최상위층이 실적을 떠받치는 구조다. 상위 소수에 대한 매출 의존도가 높아진 만큼, 백화점들도 VIP 기준을 더 정교하게 설계할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이 같은 흐름은 소비 양극화 심화와 맞물린다. 지난달 발표된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소득·자산 불평등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가 일제히 악화했다. 순자산 10억원 이상 가구 비중은 11.8%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고, 상위 10% 가구가 전체 순자산의 46%를 차지했다. 소득 상위 20%와 하위 20%의 격차도 5.78배로 전년보다 벌어졌다. 고액 소비층의 구매력이 더욱 또렷해지는 환경이다.
시대 변화에 온라인 소비층을 VIP로 끌어안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롯데백화점은 올해부터 엔트리 등급 ‘에비뉴엘 그린’ 선정에 자체 온라인몰 실적을 처음 반영한다. 온라인 구매 금액 50%를 최대 1000만원 한도로 인정하되, 오프라인 내점 12일 이상·3개 상품군 조건은 그대로 유지했다. 최상위 등급은 문턱을 높이고, 잠재 VIP는 온라인으로 저변을 넓히는 전략이다.
등급 세분화가 일으키는 심리 효과는 크다. 라운지·발레파킹·전용 행사 등 혜택이 단계별로 촘촘히 나뉘면서 소비자들은 등급 상승을 하나의 성취로 인식한다. 중고거래 플랫폼에는 “백화점 실적 삽니다”라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결제 변경이나 영수증 적립 방식으로 타인의 실적을 사서 등급을 올리려는 것이다. 시세는 거래금액의 3~4% 수준으로, 연말에는 더 비싸게 거래되기도 한다.
업계는 올해도 VIP 중심의 매출 집중이 이어질 것으로 본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올해 국내 소매시장 성장률은 0.6%에 그칠 전망이다. 성장이 멈춘 시장에서 점유율 쟁탈전이 본격화할 수밖에 없고, 결국 구매력 있는 고객을 누가 더 단단히 붙잡느냐가 승부처가 된다. 백화점 업계 관계자는 “파이가 커지지 않는 상황에서 신규 고객 유치보다 기존 VIP의 이탈을 막는 게 더 중요해졌다”며 “등급을 세분화하고 혜택을 차별화하는 건 결국 ‘한 번 잡은 고객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