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이 사라진 시대, 스포츠카가 개성을 증명하는 방식

경제

이데일리,

2026년 2월 12일, 오전 06:11

자동차 엔진이 사라진 자리에 전기모터가 들어앉는 시대다. 가솔린을 태우며 폭발적인 굉음을 내던 내연기관의 시대에 이어 고요하지만 강력한 전동화의 파도가 완성차 시장을 덮쳤다. 이 거대한 변화 앞에서 스포츠카는 실존적 고민을 겪고 있다. 효율성과 정숙함이 미덕인 일반 승용차와 달리, 스포츠카는 비효율적인 소음과 진동 자체가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슈퍼카의 전동화 시대에 임하는 각 브랜드들의 특징과 전략을 정리했다 - <편집자 주>

[이데일리 정병묵 기자] 과거 스포츠카의 존재 이유는 뚜렷했다. 더 큰 배기량, 더 높은 회전수, 더 자극적인 배기음. 그러나 전동화 시대에 들어서며 그 공식이 바뀌고 있다. 배터리와 모터가 성능의 핵심이 된 지금, 스포츠카는 ‘얼마나 빠른가’보다 ‘무엇을 증명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럭셔리 스포츠카 브랜드들은 이 질문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답하고 있다. 완성차의 전동화 파도는 이들의 정체성을 지우기보다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로터스, 전동화의 고중량…차체를 더 가볍게

로터스 에바이야
전기차는 필연적으로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영국 럭셔리카 로터스는 창립자 콜린 채프먼의 “경량화가 답이다”라는 철학을 갖고 차를 만들어왔다. 무거운 전기 배터리는 이러한 로터스의 철학에 반한다. 그러나 로터스는 이러한 한계를 부정하지 않고 가장 급진적인 정공법을 택했다. 최고출력 2000마력이 넘는 로터스의 하이퍼 전기 스포츠카 ‘에바이야(Evija)’는 출력으로 무게를 덮지 않았다. 대신 탄소 섬유 모노코크, 극단적인 경량 소재, 불필요한 부품 최소화로 경량화를 추구했다.

섀시, 차체 패널, 심지어 전면 서브 프레임까지 차체 전체를 탄소 섬유로 만들었다. 덕분에 91kWh 용량의 배터리(743㎏)를 운전석 뒤쪽에 장착하고도 1894㎏이라는 공차 중량을 달성했다. 무게를 줄이면 모든 성능 수치가 동시에 좋아진다. 즉, 모터의 즉각적인 토크를 ‘날것의 가속’이 아닌, 정밀하게 제어된 드라이빙 감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다.

로터스 관계자는 “전동화 시대 스포츠카의 본질은 ‘얼마나 빠른가’가 아니라 ‘얼마나 정교하게 반응하는가’로 차체가 가벼우면 노면 정보가 더 선명하게 전달되고 운전자는 차와 더 깊게 소통한다”며 “로터스에 전동화는 타협이 아니라, 오히려 브랜드의 원형을 현대적으로 증명하는 도구”라고 설명했다. 에바이야는 단 130대 한정 생산되고 있다.

◇마세라티, 전동화 시대와 맞는 ‘여행자’의 철학

마세라티 그레칼레 폴고레
마세라티는 태생부터 슈퍼카 브랜드는 아니었다. 마세라티 대표 브랜드 ‘그란 투리스모’는 17세기 중반 유럽 상류층 귀족 자제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돌아보며 문물을 익혔던 여행에서 유래했다. 빠르면서 거칠지 않고, 강력하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 주행 감각, 그리고 목적지보다 여정 그 자체에 가치를 두는 철학을 갖고 있다. 전기 파워 트레인이 가진 정숙성, 즉각적인 토크, 장거리 주행의 편안함이 마세라티의 정체성과 결이 맞아 떨어진다.

마세라티는 전동화 라인업에 ‘폴고레(Folgore)’라는 이름을 붙였다. 번개를 뜻하는 이 단어는 파괴보다는 순간의 아름다움과 우아한 에너지를 연상시킨다. 그란 투리스모 폴고레에서 전기모터는 공격적인 가속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대신 가속 과정의 매끄러움과 흐름을 정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빠르지만 성급하지 않고, 운전자를 재촉하지 않는 성격은 마세라티가 전동화를 해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마세라티는 전기차 사운드 설계에 공을 들였다. 전기모터와 인버터가 만들어내는 고유의 고주파 소음을 엔지니어들이 정밀하게 튜닝하고 증폭시켜, 마치 제트기 엔진과 같은 날카롭고 미래지향적인 ‘디지털 터빈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이는 내연기관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전기차만이 낼 수 있는 새로운 소리의 미학을 창조하려는 시도라고 평가받는다.

◇하이브리드 슈퍼카의 람보르기니·페라리

람보르기니 ‘레부엘토’
‘거침’의 상징 람보르기니에 전기차는 아직 이질적이다. 람보르기니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슈퍼카 ‘레부엘토(Revuelto)’를 통해 기존 자연흡기 방식(가속페달을 밟는 순간 공기를 흡입해 엔진의 폭발로 이어지는) ‘V12’ 엔진을 최대한 오래 살려두는 전략을 택했다. 레부엘토의 핵심은 변화가 아니라 강화다. 전기모터는 엔진을 대체하지 않는다. V12 엔진의 폭발적인 캐릭터를 더 즉각적으로 더 과감하게 드러내는 도구로 쓰인다. 정숙함이나 효율을 위한 하이브리드가 아니라, 가속 초반의 반응성과 체감 충격을 증폭시키는 장치다.

페라리 라페라리
페라리도 하이브리드차를 통해 전기차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페라리에 스포츠카의 본질은 속도 같은 수치가 아니라 경량화, 성능, 고유한 주행 경험에 중점을 둔 레이싱 헤리티지가 중요하다. ‘F1’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페라리는 오랫동안 레이싱 액티비티와 공도용 차 사이의 의미 있는 기술 이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2013년 페라리 최초의 하이브리드 ‘라페라리(LaFerrari)’는 탄소섬유 차체로 경량화를 노렸다. 이 슈퍼카는 눈길을 사로잡는 오렌지색 고압 케이블과 듀얼 전기 모터 구성으로, 6.3리터 V12 엔진에 163CV의 전기 모터를 결합했다.

2020년에 출시된 ‘SF90 스트라달레’는 한 단계 더 진보했다. 최신 모델인 ‘SF90 XX 스트라달레’는 7900rpm에서 797CV를 발휘하는 4.0리터 트윈터보 V8으로 구동된다. 페라리는 곧 순수 전기차 ‘일레트리카’를 내놓을 예정이다. 2열 좌석과 사륜구동이 특징인 이 신형 모델은 ‘F1’에서 시작된 20년 이상의 전동화 연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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