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기 광주교대 명예교수
채용 차별 방지법 추진 이유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출신학교·학력 채용 차별 방지법('채용 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 도입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 개정안의 취지는 지난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블라인드 채용'의 정신을 법제화해 공고히 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현행법이 채용 때 출신 지역, 혼인 여부, 재산 정보 요구를 금지하는 것에 더해, 그 규제의 범위를 학력과 출신학교, 나아가 신앙까지 확장하겠다는 것이다.
한 시민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많은 국민이 채용 과정에서 학벌의 영향력을 체감하고 있으며, 학력 차별을 규제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학벌로 인한 좌절과 소외감이 깊은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하게 질문해야 한다. 출신학교와 학력을 기재하지 않게 하면 '실력으로 평가받는 사회'가 되고, '사회 개혁과 교육 발전을 가로막은 거대한 괴수 같은 학벌주의'가 사라지며, '공교육이 빠르게 정상화하고 사교육 과열 문제도 완화'될까. 이러한 기대의 저변에는 우리 사회가 아직 제대로 된 실력주의(meritocracy)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시민단체가 1월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채용에서 학력차별 금지 법안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 뉴스1 이승배 기자
우리 사회에서 학력과 실력의 관계
필자는 저서 '실력의 배신'에서 우리 사회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극단적 실력주의 사회'임을 역설한 바 있다. 우리 사회의 학벌은 실력과 졸업장(출신 대학) 간의 괴리가 큰 미국식의 학벌 또는 학력(crdential)과는 다르다.
우리 사회의 학벌은 소수의 명문대가 우수 인재를 독점하고 고도의 질 높은 교육을 시행한 결과로 해당 대학 졸업생이 국가고시, 공기업, 대기업 등 선호 직장을 차지하면서 형성된 실력 기반의 '파벌로서의 학벌'에 가깝다. 우리가 가정하고 있는 것과 달리 학력과 실력 간의 괴리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것이다.
과거 행정고시, 사법시험 등의 국가고시에서 특정 대학 출신 비율이 압도적이었던 것은 채용 과정의 차별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서열화된 인재들이 시험을 통해 그 역량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7년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 도입 초기 결과를 복기해 보면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된다. 비수도권 출신, 여성, 고연령 입사자의 비율이 도입 전보다 오히려 줄어드는 기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학력과 실력의 상관관계가 높은 우리 현실에서 실력을 객관적으로 측정할수록 소위 명문대생이 선발될 가능성이 커짐을 시사한다. 블라인드 채용의 경우 먼저 NCS(국가직무능력표준) 시험으로 지원자의 2~4배수를 선발했는데, 경쟁이 치열한 직업의 경우 합격자 중 몇몇 대학 졸업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블라인드 채용 도입 예상 결과
만약 법 제정을 통해 강제적인 블라인드 채용이 확산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초기에는 잠시 명문대생의 비율이 하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은 금세 생존 본능을 발휘할 것이다. 대학의 명예를 걸고 블라인드 채용 기준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교육과정을 재편할 것이다. 면접 비중이 커지면 면접 기술을, 다양한 스펙이 중시되면 해당 조건을 갖춰주는 맞춤형 교육을 할 것이다. 이들이 실패한다면 명문대의 지위를 상실하고, 대신 새로운 명문대가 부상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객관적 평가가 어려운 분야에서 발생한다. 정교하게 설계되지 않은 블라인드 채용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실력이 아닌 '운'이나 '부모의 배경'이 작용하는 무대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학교 이름을 가린 자리에 채워질 또 다른 지표들은 대개 고가의 사교육이나 부모의 정보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출신학교채용차별방지법 국민운동 서명 페이지 갈무리
더 직접적이고 구조적인 처방
진정으로 파벌로서의 학벌 문제를 완화하길 원한다면, 청년들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실력을 키움으로써 대한민국의 경쟁력이 높아지길 바란다면, '정보의 은폐'라는 우회로보다는 더 직접적이고 구조적인 처방도 검토해야 한다.
예컨대 국가고시, 공공기관 채용 등에서 특정 대학 합격자가 전체의 일정 비율(예: 10%)을 넘지 못하게 하는 '대학별 합격 상한제' 같은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는 학교 정보를 숨기는 방식이 아니라 결과의 과도한 쏠림 자체를 제어하는 장치다. 적용 시점을 몇 년 유예해 충분한 예측 가능성을 제공한다면, 특정 대학으로의 인재 과잉 쏠림 현상을 완화하는 실질적인 유인책이 될 수도 있다.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재검토
법은 결코 선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정교한 설계가 필수적이다. 먼저 우리 사회 학벌 현상 발생 원인에 대한 재고찰을 간언한다. 정확한 분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처방이 만들어져야 제대로 작동하는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아울러 인재들이 왜 소수의 '안정된 자리'에만 목을 매는지 그 근본 원인을 직시해야 한다. 직종 간 임금 격차와 근무 여건의 양극화가 극심한 상황에서 유능한 청년들이 도전보다는 '안정의 경쟁'으로 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공공기관의 보수 체계 합리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 해소 등 일자리의 질적 상향 평준화가 병행되지 않는 채용 절차의 개혁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채용차별방지법 추진을 보다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재검토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공교육 정상화라는 선의는 실종되고 '사교육 강화'라는 부작용만 낳았던 '공교육정상화법'처럼 부작용만 커질 우려가 농후하다.
☞ 박남기 광주교대 명예교수는…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교육정책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국가인재경영연구원 교육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광주교대 총장, 한국교육행정학회장, 대한교육법학회장, 한국교원교육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최고의 교수법, 리더십 등을 주제로 1000회 이상의 강연을 통해 세상과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실력의 배신'(2018), '생성 AI 시대 최고의 교수법'(2024) 등 20여 권이 있고, 100여 편의 논문과 1000편 이상의 각종 칼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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