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단체·주민 주도, 시골서 1조 기업 키웠다

경제

이데일리,

2026년 3월 30일, 오후 08:55

[도쿠시마=이데일리 마켓in 박소영 기자] 70년된 민가를 개조해 만든 사무실. 도쿄 시부야에 있는 본사와 언제든 소통 가능한 원격 근무 시스템을 갖췄다. 외양간이었던 곳에는 해먹을 설치해 직원들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했다. 한적하고 자연친화적인 곳에 사무실을 열자 직원들은 복잡한 도심 대신 줄줄이 이 곳으로 이주해왔다.

도쿠시마현 가미야마정에 사무실을 연 IT 기업 ‘산산’ 이야기다. 위성사무실과 본사 간 협업을 기반으로 성장궤도에 오른 산산은 2019년 도쿄증권거래소 기업공개(IPO)에 성공했다. 당시 공모가 기준 약 1000억엔(약 1조원) 수준의 시가총액을 인정받았다.

산산 사례를 본 다른 IT 기업들도 가미야마정에 위성사무실을 차렸다. 고소득 전문직 젊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이곳은 일종의 일본 시골판 실리콘밸리로 불리고 있다. 이주자가 늘자 식당, 카페, 게스트하우스, 학교 등이 생겨났다. 가미야마 사례가 성공할 수 있던 가장 큰 배경은 NPO 그린밸리에 있다. 그린밸리는 유휴건물을 매입해 단장하고 공유사무실을 꾸렸다. 기업이나 예술가, 예비 창업가에 사무실을 제공했다.

도쿠시마현 가미야마정에 위치한 산산 위성사무실 [사진=산산]


주민의 힘도 컸다. 지역사회는 도쿠시마현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마을 단장에 나섰다. 지역 활성화·투자 정책을 펼칠 때는 그린밸리와 같은 민간단체, 주민이 직접 회의에 참여해 지역사회에 무엇이 필요한지 의견을 전하고 정책을 제안했다. 가미야마 사례처럼 일본은 지역에 위성사무실을 유치하거나, 지역 펀드를 결성하고, 민관이 협력하는 선순환 구조가 지역 곳곳에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자본시장 관계자들은 이제 단순 인구 유입을 넘어, 투자와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한 지역 생태계가 구축되는 식으로 지역 정책이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한국보다 한참 앞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2014년에는 ‘지방창생(地方創生)’ 정책으로 인구와 산업을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오랜 기간 거래가 없는 은행 예금인 ‘휴면예금’을 활용해 투자하는 제도도 구축돼 있다. 휴면예금으로 지자체가 해결하기 힘든 지역사회 문제를 민간에 맡겨 해결하게끔 한다. 일본 정부는 2019년부터 공익활동네트워크(JANPIA)를 휴면예금 자금 배분·관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지정했다. 올해 2월 기준 JANPIA가 지원한 누적 규모는 약 419억엔(약 3954억원)에 달한다. 현재까지 269개 프로젝트로 1572개 사업이 진행됐다.

가와구치 토모코 JANPIA 매니저는 “휴면예금 활용 제도는 JANPIA, 자금배분 기관, 실행 기관의 총 3단 구조로 운영된다”며 “정부가 직접 손대기 어려운 영역에 민간 전문성을 연결하고, 단순 자금 지원을 넘어 지속적인 비재무적 지원까지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 자본시장 관계자들은 이제 일본 지역 스타트업 생태계가 본격적인 도약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한다. 일본 현지 벤처캐피탈(VC) 관계자는 “사카이치 정권은 지역창생에서 더 나아가 벤처 투자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며 “특히 각 지역 기반 스타트업 중 일본이 세계적으로 앞서나갈 분야로 주목받는 양자컴퓨팅, 핵융합 등 미래 기술 투자를 장려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반면 한국은 여전히 수도권과 관 중심 지역 투자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구유입이나 도시재생까지 이어지지 않는 일시적 자금 풀기에 그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벤처 강국’으로의 도약을 목표로 하며 지역 벤처 생태계 살리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같은 정책의 일환으로 '지역성장펀드’도 2300억원이라는 역대 최대 규모로 조성될 예정이다.

국내 관계자들은 풍부한 유동성만으로는 실제 실적을 내는 사후관리까지 장담하긴 어렵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비수도권 벤처투자 비중은 여전히 20%라 단순히 자금만 늘린다고 해서 수도권 집중 현상이 당장 해소되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높다. 일본 사례처럼 정부과 지자체가 지원하되 민간과 주민에게 주도권을 줘야 지역 스타트업 생태계가 탄탄하게 갖춰질 것이란 조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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