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전기차 보조금 우대가 타당한 이유[기자수첩]

경제

이데일리,

2026년 4월 09일, 오후 07:33

[이데일리 정병묵 기자] 1990년대 후반 한·미 투자협정 체결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 극장가에서 유지 중이던 ‘스크린쿼터(Screen Quota)’ 제도 폐지를 요구했다. 스크린쿼터제는 극장이 연간 5분의 1 이상 한국 영화를 상영하도록 강제한 제도다. 한국 콘텐츠가 전세계 OTT를 휩쓰는 지금 다소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당시 유명배우 등 영화인들은 제도를 사수하기 위해 삭발투쟁까지 감행했다.

BYD코리아가 전국을 순회하며 진행 중인 '찾아가는 쇼룸' (사진=BYD)
국토교통부가 최근 전기 저상버스(노약자·장애인이 편리하게 탈 수 있도록 출입구에 경사판을 설치한 버스) 보조금을 기존 일괄지급 방식에서 차등지급 방식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저상버스면 모두 보조금을 지급했으나 전기배터리 효율과 화재 안전성을 평가하는 ‘성능 및 배터리 안전계수’를 평가항목에 추가한 것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또 전기승용차 보조금 산정 시 국내 산업 기여도를 높게 평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에 따라 배터리 품질이 한국산보다 떨어지는 중국산 저상버스나, 국내 설비투자 고용에 기여하지 않는 외산 전기승용차는 구매 보조금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이 제도에 대해 수입차 차별이라는 일부 의견도 있지만 이는 위기에 처한 우리 전기차 산업의 처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현대차·기아가 세계 3위 판매 기업으로 도약했지만 전기차는 이 분야 선도자 테슬라와 저가로 무장한 중국 BYD 등의 위협에 큰 위기를 맞았다. 최근 국제 경제는 자국 우선주의가 대세다. 미국과 유럽 모두 자국 완성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온갖 정책을 다 펼치는데 우리만 ‘공정 경쟁’을 고수할 이유는 없다.

스크린쿼터제는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과정에서 대폭 축소되며 결국 유명무실해졌다. 하지만 자국 영화산업 보호정책의 효과는 뚜렷했다. 2003년 이후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등 명작들이 쏟아진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는 스크린쿼터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이 시기 ‘월드클래스’로 올라선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오늘날 한국이 세계적인 콘텐츠 강국이 되는 토대가 됐다.

전기차는 소프트웨어중심차(SDV) 전환은 물론 자율주행 상용화와도 직결되는 미래 주요 국가 먹거리 산업이다.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처럼, 미래에 꽃을 피우기 위해 우리가 보호할 명분이 충분하다. 다만, 주요국과 외교·무역 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피는 후속 조치는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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