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맡던 라벤더 향, 사실 가짜였다?…남프랑스에서 깬 오감

경제

뉴스1,

2026년 5월 04일, 오전 06:30

뤼베롱에 자리한 라벤더 박물관(Musée de la Lavande 제공)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스마트폰 갤러리에 박제된 수백 장의 '인증샷'. 다음 여행지를 만나는 순간 금세 휘발된다. 하지만 손끝으로 빚고, 코로 들이마시고, 혀끝으로 맛본 감각은 다르다. 유통기한이 없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짙은 여운, 이른바 '신체화 기억'(Embodied Memory)이다.

파리도 좋다. 근데 진짜 쉼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시선은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향한다. TGV로 3시간. 렌즈 너머가 아닌 몸에 직접 새겨지는 남프랑스가 거기 있다.

570년 전통의 과자 '칼리송'(Calisson)© 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1920년 문을 연 디저트 명가 '콩피즈리 뒤 루아 르네'(Confiserie du Roy René)에서 진행한 칼리송 만들기 체험© 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손끝의 온기와 혀끝의 달콤함…570년 전통 '칼리송'의 맛
엑상프로방스에 1920년 문을 연 디저트 명가 '콩피즈리 뒤 루아 르네'(Confiserie du Roy René). 1454년 르네 왕의 결혼식 때 왕비가 맛보고 "이것은 포옹이에요(di calin soun)"라 외쳤다는 570년 전통의 과자 '칼리송'(Calisson)을 직접 만들 수 있는 곳이다.

핵심은 정교한 식감과 무게다. 멜라니 담당자는 "껍질 아몬드와 깐 아몬드를 섞어야 완벽한 질감이 나온다"며 "멜론·오렌지·레몬 콩피를 더해 클래식 칼리송 1개당 정확히 13.3g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했다. 여름엔 피스타치오, 심지어 마늘로도 변주를 시도한다.

반죽을 만지고 프레스로 꾹 눌러 모양을 냈다. 갓 오븐에서 나온 칼리송 한 입. 평소 단것 안 먹는 기자도 눈이 번쩍 뜨였다. 체험을 마치고 나왔을 때 10평 남짓한 매장은 이미 북새통.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한국인 신혼부부도 눈에 띄었다.

에기유 마을의 '무랭 데기유'(Moulin d'Eguilles)© 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이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올리브 오일을 시음할 수 있다.© 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스페인 사람들에겐 나쁜 맛"… 전통 '버진 올리브오일'의 반전
코를 찌르는 풋내 대신 블랙 올리브의 묵직한 고소함이 훅 치고 들어온다. 요즘 국내에선 공복 올리브유가 유행하며 '엑스트라 버진'이 무조건 최고로 통한다. 에기유 마을의 '무랭 데기요'(Moulin d'Eguilles)에서 이 공식이 보기 좋게 깨진다.

이 농가의 올리브오일은 크게 두 종류다. 수확 직후 바로 압착해 풋풋하고 청량한 '프뤼테 베르'(Fruité Vert)와, 며칠간 숙성 후 압착해 트뤼프·카카오 향이 감도는 부드러운 '구 탈리앙'(Go t à l'Ancienne)이다. 여기에 바질·레몬 등을 블렌딩한 아로마틱 라인까지 더해진다.

각종 올리브오일대회에서 수상한 상이 벽 한쪽에 걸려있다.© 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루이즈 다니엘 대표는 "150kg 미만은 공동 수조에 모아 짜지만, 그 이상을 가져온 생산자는 자신만의 올리브로 짠 나만의 오일을 챙겨갈 수 있다"며 "스페인 사람들에겐 이 숙성향이 나쁜 맛으로 통하고 규정상 엑스트라 버진 표기도 못 하지만, 우리에겐 전혀 나쁜 맛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그린 오일과 다크 오일 각각에 4가지 품종을 섬세하게 배합해 다채로운 풍미를 빚어낸다"고 자신했다.

AOP 엑상프로방스·AOP 프로방스 두 가지 원산지 인증에 유기농 인증까지 갖춘 이 농가는 2025·2026년 2년 연속 프로방스 지역 올리브오일 대회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는 세낭크 수도원© 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히스토패드(Histopad)라는 증강현실(AR) 기기로 12세기 수도사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텅 빈 공간을 채우는 고요한 빛과 공기…세낭크 수도원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도,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도 없다.

1148년 창건된 뤼베롱의 '세낭크 수도원'(Abbaye Notre-Dame de Sénanque)은 철저한 비움으로 감각을 채우는 공간이다. 수도원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라벤더밭은 이제 이곳의 상징이 됐지만, 창건 당시엔 없었다.

수도사들이 생계를 위해 직접 일구며 가꾼 결과물이다. 매년 6월 중순~7월 말, 보랏빛 라벤더가 만발한 수도원의 풍경은 뤼베롱을 대표하는 엽서 그 자체다. 프로방스를 찾는 여행자라면 이 시즌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수도원 앞에 라벤더 밭이 펼쳐져 있다.© 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프로방스에서 유명한 상티봉.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작은 마을 주민 피규어다.© 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프랑스혁명 당시 국유화되는 등 수차례 부침을 겪었지만 1988년 소수의 수도사들이 돌아왔다. 현재 6명의 시토회 수도사들이 라벤더와 올리브를 가꾸며 하루 일곱 번의 기도와 노동을 이어가고 있다. 교회·회랑·참사회실·온기실·옛 기숙사 등 중세 건축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내부는 철저히 비어 오직 서늘한 공기와 빛만 감돈다. 가이드 투어(프랑스어·1시간)와 자유 관람 두 가지 방식으로 방문할 수 있는데, 외국인 여행자에게는 히스토패드(Histopad) 자유 관람이 제격이다. 어른 기준 8.5유로(약 1만3000원)로 태블릿을 빌리면 영어 등 9개 언어로 12세기 수도사들의 일상을 AR로 생생하게 재현해 볼 수 있다. 아날로그 공간과 디지털이 겹쳐지는 묘한 감각이 인상적이다.

라벤더 박물관에서 진행하는 가이드 투어© 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코끝을 강타한 향기, 손끝에 남은 진귀함…라벤더의 반전
'라벤더 박물관'(Mus e de la Lavande)에 들어서자마자 아찔한 향기가 훅 이끈다.

백미는 방향제 만들기 체험이다. 말린 라벤라벤더 꽃알갱이를 한 움큼 쥐어 천 주머니에 넣고 끈으로 묶는다. 잎을 주무르는 내내 손끝에서 향이 터져 나왔다. 체험 후에도 두 손에 남은 잔향이 프로방스의 숨결을 실감케 했다.

그런데 막스 랭슬레 담당자가 던진 한마디가 반전이었다. 그는 "우리가 마트나 방향제에서 맡는 그 향, 사실 라벤더가 아니다"며 "수확량이 5배 많은 교배종 라반딘(Lavandin)"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950년대 세탁기가 보급되며 세제 향료로 쓰이다 보니 사람들이 그게 라벤더인 줄 착각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진짜 파인 라벤더(Fine Lavender)는 해발 800m 이상 고산 지대에서만 자란다. 프랑스 정부가 방향 식물 중 유일하게 AOP 인증을 부여한 치유 식물이다. 에센셜 오일 1L를 얻으려면 꽃 100kg을 증류해야 한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손끝에 밴 잔향이 진짜 귀한 보물처럼 느껴졌다.

라벤더 박물관© 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seulbi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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