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산방 봄볕드는 툇마루 좌석(서울관광재단 제공)
신록의 계절 5월, 일상의 번잡함을 잠시 잊고 쉼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한옥 명소가 주목받고 있다. 특히 드라마, 영화 등 K-콘텐츠의 배경이자 서울의 역사적 정취를 오롯이 간직한 한옥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9일 서울관광재단에 따르면 재단은 자연과 어우러진 차경(借景)의 철학을 품은 서울 도심 속 한옥 명소 4곳을 추천했다.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은 자연 친화적으로, 주변 환경을 인공적으로 가공하기보다 지형과 조화를 이루며 건물과 자연이 한 몸처럼 어우러지게 했다.
이러한 철학의 정점이 바로 '자연을 빌려 내 정원으로 삼는다'는 뜻의 차경이다. 한옥의 창과 문이 빛과 바람의 통로를 넘어 담장 너머의 산과 하늘, 우거진 숲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액자 역할을 하는 것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한옥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북한산의 봉우리를 품고 있는 봉황각(서울관광재단 제공)
북한산 자락에 깃든 고요한 품격 '선운각'
빌딩 숲 가득한 서울 도심을 벗어나 북한산 우이동 계곡에 다다르면 웅장한 규모와 단아한 미를 갖춘 한옥 선운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1960년대 지어진 대규모 민간 한옥으로, 근대사의 굴곡을 간직한 곳이다. 현재는 한옥 카페 겸 야외결혼식장으로 변모해 일반에 공개돼 있다.
서울 민간 한옥 중 최대 규모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입구부터 이어지는 긴 돌담과 박석은 방문객을 고풍스러운 시간 속으로 이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유진 초이가 근무하는 미국 공사관의 배경이 되었던 이 돌담길은 여전히 포토존으로 사랑받고 있다.
자개테이블을 놓은 선운각 한옥내부(서울관광재단 제공)
본관 2층 테라스는 북한산의 유려한 능선을 막힘없이 감상할 수 있는 조망 명소이며, 한옥 내부에 마련된 좌식 좌석은 커다란 등과 화려한 자개 테이블이 놓여 한국적 미감을 선보인다. 선운각의 백미는 푸른 잔디가 펼쳐진 한옥 마당이다. 기와지붕 너머로 북한산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지며,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고 가을에는 단풍이 짙게 물든다.
선운각에서 계곡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3·1운동의 발상지이자 천도교의 성지인 봉황각이 나타난다. 1912년 의암 손병희 선생은 북한산 자락 아래 한옥을 세우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 본연의 결이 살아있는 기둥과 보에서는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후문을 나서 언덕을 50m 오르면 손병희 선생의 묘에 닿으며, 인근 우이동 솔밭근린공원까지 산책 코스를 넓히면 수백 그루의 소나무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도 덤으로 즐길 수 있다.
백인제 가옥 안채 유리창과 붉은벽돌(서울관광재단 제공)
근대 한옥의 미학이 담긴 '백인제 가옥'
북촌 한옥마을의 좁은 골목을 오르다 보면 웅장한 대문과 마주하게 된다. 백인제 가옥은 일제강점기 시절 서울 최상류층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근대 한옥이다. 1913년 당시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압록강에서 가져온 흑송을 사용해 지었으며, 1944년 당대 외과 의술의 일인자인 백인제 선생의 소유가 됐다.
백인제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를 엄격히 구분했던 전통 방식에서 벗어나, 두 공간을 복도로 연결해 신발을 벗지 않고 내부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된 파격적인 구조가 특징이다. 유리창을 대폭 늘리고 붉은 벽돌로 담장을 쌓는 등 최신 건축 기법도 도입했다.
백인제가옥의 가장 큰 특징은 복도가 있다는 점(서울관광재단 제공)
최근에는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 회장 저택, 영화 '암살' 속 친일파 강인국의 저택 촬영 장소로 알려지며 K콘텐츠 여행지로도 주목받는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오전 9시~오후 6시)까지 무료로 개방되며,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 누리집을 통해 사전 예약하면 해설사와 함께 내부를 직접 관람할 수 있다. 인근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북촌동양문화박물관 2층 테라스에 오르면 북악산 산세와 경복궁 일대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운현궁 안채 이로당, 뒤에 운현궁 양관 건물이 보임(서울관광재단 제공)
왕이 나고 자란 도심 속 사저 '운현궁'
빌딩이 늘어선 종로 한복판, 두터운 돌담을 경계로 평온함을 간직한 곳이 바로 조선 후기 역사의 중심지였던 운현궁이다. 흥선대원군의 사저이자 고종 황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노안당과 노락당으로 이어지는 건축미는 궁궐에 버금가는 정수를 보여주며 겹겹이 층을 이룬 기와지붕은 중후한 멋을 자아낸다.
운현궁 마당 너머 나지막한 언덕 위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2층 저택인 '운현궁 양관'이 자리해 있다. 1912년경 일제가 황실 인사를 회유할 목적으로 지어준 건물로, 외벽에 새겨진 이화(李花) 문양만이 조선 왕실의 것임을 증언한다.
운현궁 노안당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방문객(서울관광재단 제공)
그동안 운현궁은 드라마 촬영지로 큰 사랑을 받았다. 올해 방영을 앞둔 아이유, 변우석 주연의 '21세기 대군부인'을 비롯해 20년 전 추억의 드라마 '궁'에서 주지훈이 살던 동궁의 서양식 건물로 등장했다.
드라마 '각시탈'의 이시용 백작 저택, '더킹 투하츠'의 신궁으로도 나왔으며, 특히 20.5% 시청률을 기록했던 '도깨비'에서는 주인공 공유의 집으로 등장해 널리 알려졌다. 현재 양관은 덕성여대 종로캠퍼스 내에 위치해 담장 밖에서 외관을 감상할 수 있다.
지척에 자리한 서울우리소리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다. 전통 한옥과 현대 건축 양식이 어우러진 박물관으로 농부의 뱃노래, 상여소리 등 서민들의 향토 민요를 헤드셋을 통해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수연산방 기품이 느껴지는 외관(서울관광재단 제공)
문인들의 사랑방에서 찻집으로 '수연산방'
성북동의 낡은 돌담 너머 자리한 수연산방은 한국 단편 소설의 선구자인 상허 이태준이 1933년 직접 지은 개량 한옥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한 건물에 집약하고 섬세한 누마루를 두어 가옥 전체에 격조를 더했다.
정지용, 이상 등 당대 문인들이 모여 문학과 삶을 논하며 밤을 지새웠던 이곳은 현재 전통 차를 맛볼 수 있는 찻집으로 운영 중이다. 영화 '하녀', 드라마 '부부의 세계', 예능 '놀면 뭐하니?' 등 다양한 콘텐츠 촬영지로 알려지며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수연산방 누마루의 내부 모습(서울관광재단 제공)
성북동에는 수연산방과 더불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가 살던 최순우 옛집도 자리해 있다. 1976년부터 1984년까지 거주했던 곳으로, 기역(ㄱ) 형태의 사랑방과 안방이 미음(ㅁ)형 구조를 이루며 화려함보다는 단정한 선과 나무 질감을 살린 정갈한 매력을 풍긴다.
seulbin@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