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 1개 옮기는데 36시간 묶인다"…국회서도 특금법 개정안 역풍 우려

경제

이데일리,

2026년 5월 12일, 오후 05:21

[이데일리 서민지 기자] 2027년 2월, 가상자산 투자 4년 차인 김모 씨는 보유 중인 비트코인 1개(약 1억4000만원)를 해외 거래소 코인베이스(Coinbase)로 송금하려 했다. 국내에서 거래되지 않는 비트코인 무기한선물(perpetual) 상품에 투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금융당국이 추진 중인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1000만원 이상 가상자산 이전 거래로 분류돼 자동으로 의심거래보고(STR) 대상이 됐다. 김씨는 이를 피하기 위해 990만원씩 약 15차례로 나눠 송금했지만 반복적인 분할 거래 역시 의심거래로 간주돼 강화된 고객확인(EDD)이 자동으로 발동됐다. 결국 자산 이동이 24~36시간 지연되는 동안 비트코인 가격이 크게 변동했고, 추가 가스비까지 부담하면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내년 1월부터 1000만원 이상 가상자산 이전 거래를 일괄적으로 STR 대상으로 지정하는 특금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되면 이 같은 사례가 급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불편을 겪은 투자자들이 국내 거래소 이용을 기피하고 해외 거래소로 자산을 옮기면서 오히려 자금세탁 방지와 과세 추적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AML(자금세탁방지) 규율체계와 한국 특정금융정보법 정비 과제’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서민지 기자)
한서희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12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AML(자금세탁방지) 규율체계와 한국 특정금융정보법 정비 과제’ 간담회에서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특금법 시행령 개정안은 자금세탁방지 기능을 오히려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변호사는 개정안의 핵심 조항으로 △트래블룰 기준금액 100만원 폐지 △수신 사업자의 정보 수취 및 거래 거절 의무 △외국 가상자산사업자 평가 및 거래 제한 △1000만원 이상 거래 자동 STR △비수탁형 지갑 거래 제한 등을 꼽았다.

특히 1000만원 이상 자동 STR 조항에 대해 “가상자산 거래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얼마나 큰 규제인지 바로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며 “비트코인 1개만 전송해도 자동 STR 대상이 돼 24~36시간을 기다려야 할 수 있고, 그 사이 가격 변동으로 큰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파생상품 투자자의 경우 증거금 전송이 지연되면 추가 증거금을 제때 납입하지 못해 강제 청산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디파이(DeFi)나 스테이킹 수익을 국내로 회수할 때도 본인 자산임을 입증하는 절차가 복잡해져 사실상 회수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사회적 비용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 변호사는 연간 국내에서 해외로 이전되는 가상자산 규모를 160조원, 1인당 평균 이전 금액을 1억원으로 가정할 경우 자동 STR 회피를 위한 분할 거래가 연간 1440만건 추가로 발생하고 이에 따른 가스비만 약 1000억원에 이를 수 있다고 추산했다.

그는 “STR 보고가 폭증하면 정작 실제로 의심해야 할 거래를 선별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며 “자동 STR은 분석의 정밀도를 떨어뜨리고 STR 제도의 본래 취지를 훼손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또 “시행 전부터 투자자들이 해외 거래소로 자산을 미리 이전할 가능성이 높고, 시행 이후에도 불편이 지속되면 국내 거래소에서 자산을 모두 빼낼 수 있다”며 국내 디지털자산 산업 위축을 우려했다.

한서희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가 12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AML(자금세탁방지) 규율체계와 한국 특정금융정보법 정비 과제’ 간담회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서민지 기자)
국내 거래소 이용 감소는 감독당국의 추적 능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는 국내 거래소의 고객확인(KYC)과 트래블룰을 통해 자금 흐름을 비교적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해외 거래소 이용이 늘어나면 금융정보분석원(FIU)과 국세청이 거래 데이터를 확보하기 어려워져 자금세탁 방지와 과세 집행이 오히려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변호사는 “1000만원 이상 자동 STR은 사회적 비용이 과도하게 큰 조항”이라며 “투자자들이 감독이 어려운 해외 시장으로 이탈하지 않도록 제도 전반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도 “1000만원 이상 거래를 모두 의심거래로 간주하는 것은 STR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많이 보고하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구조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비판했다.

그는 “1년에 500만 건이 넘는 STR이 발생하면 FIU가 이를 받아 분석할 역량과 인력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며 “일률적 금지와 자동 보고 중심이 아니라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위험 기반 접근(RBA)으로 재설계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블록체인 컴플라이언스 전문기업 보난자팩토리의 김영석 대표는 “개인지갑으로 보내면 규제를 얼마든지 우회할 수 있다”며 “결국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 거래소가 협조를 거부하면 우리는 대안이 없다”며 “우리가 스스로 과도한 규제를 만들어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가상자산거래소 고팍스의 원화 실명 계좌를 맡고 있는 전북은행의 정상훈 부행장은 “가격 변동성이 큰 시장에서 거래 지연은 이용자를 시세 변동 위험에 그대로 노출시킨다”며 “결과적으로 소비자 보호라는 규제의 본래 목적과 정반대로 직접적인 금전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자동차를 빠르게 달리게 하는 것은 가속 페달이 아니라 성능 좋은 브레이크”라며 “디지털자산 시장도 규제라는 안전장치가 정밀하게 설계될 때 지속 가능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국회에서는 특금법 시행령 개정안과 관련해 당국에서 의견 청취 없이 통보한 데 대해 비판이 쏟아졌다.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자산태스크포스(TF) 소속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FIU에 업계 의견 청취를 하지 않고 시행령 개정안을 내놓았는지 따져 묻겠다”고 말했다.

민 의원은 “우리 금융당국이 근본적으로 디지털자산을 누르려고만 하는 것 같다”며 “디지털자산기본법에 대해서 정부안도 내지 않고 법안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더니 이젠 특금법 시행령 개정안 입법예고에 대해 묻는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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