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의 크립토네이션] 美클래리티법과 특금법 시행령 개정

경제

이데일리,

2026년 5월 17일, 오후 02:00

[이데일리 이정훈 디지털자산센터장] 미국 은행권과 디지털자산업계가 지리한 공방과 밀고 당기기를 벌인 끝에 디지털자산 시장구조법, 일명 클래리티법(Clarity Act)이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를 통과했습니다. 상원이 처음 법 제정안 초안을 공개한 지 10개월 만입니다. 미국은 지난해 스테이블코인을 합법화하는 지니어스법(Genius Act)를 확정한 뒤, 스테이블코인 보유자에 대한 이자지급 여부가 법에서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을 반영해 곧바로 클래리티법이라는 후속 입법을 준비해왔습니다.

이 법은 스테이블코인 투자자에 대해 ‘그냥 보유하고만 있으면 이자를 줄 수 없다’고 명시하며 은행 예금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면서도, 신용카드처럼 결제 용도나 다른 디지털자산 거래에 활용하는 경우에는 카드사가 포인트를 리워드로 지급하듯이 이자를 보상처럼 제공할 수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또 토큰이 어떤 경우에 증권인지, 어떤 경우 상품인지, 아니면 기타 자산인지를 확실히 구분했고, 그에 따라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라는 금융감독 권한을 가진 두 ‘시어머니’의 감독 영역도 명확하게 나눴습니다.

아직 상원과 하원 본회의라는 최종 관문이 남아있긴 해도, 이번 조치로 ‘클래리티’라는 법안명 그대로 미국 디지털자산시장에는 규제의 ‘명확성’과 ‘명백함’이 세워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선지 미국 디지털자산업계와 언론들은 이번 클래리티법의 상원 통과를 두고 “FTX 거래소 붕괴 사태 이후 미국 연방 차원에서 이뤄진 디지털자산 분야에서의 가장 중대한 진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시장도 기업도, 악재보다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을 더 싫어한다고들 합니다. 악재엔 대응할 수 있지만, 불확실성엔 대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앙화된 시스템과 그 감독, 통제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is)로서 탈중앙화 기치를 내걸고 등장했던 디지털자산 분야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 만나는 디지털자산시장 참가자들 모두가 입버릇처럼 “규제 준수”를 얘기할 정도로, 규제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시장 퇴출을 의미하니 말입니다.

이런 미국을 보고 있노라면, 이번주 내내 국내에서 있었던 특정금융정보법(이하 특금법) 시행령 개정을 둘러싼 논란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규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장과 사업자들에게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번 특금법 시행령안은 애초에 업계와의 교감 없이 진행되다 보니 과잉 입법이라는 비판을 받게 됐습니다. 특히 시행령은 일말의 위험 소지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했는지, 국회가 입법한 상위 법령과의 정합성도 맞지 않았습니다.

특금법 시행령 상 트래블룰(100만원 이상 이전 시 송신사업자의 정보 확인) 적용대상을 현행 ‘100만원 이상’에서 ‘100만원 미만’ (모든 거래)으로 확대하는데, 합리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두나무와 빗썸, 코인원, 코빗 등은 특금법 시행령 위반으로 금융정보분석원(FIU)으로부터 받은 제재가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원은 트래블룰 자체에 ‘100만원 미만 거래에 대해서는 고객확인(KYC) 의무를 부과하거나 미신고 사업자와 거래를 금지하도록 하는 규정이 없었다’며 거래소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번 시행령 개정안에 트래블룰 적용 대상을 ‘100만원 미만’으로 확대하는 근거는, 당국이 1심에서 패소한 내용을 보완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국내 가상자산 이전거래의 60%가 100만원 미만인데, 그 수 많은 이전거래 모두를 신고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모두가 의구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트래블룰 이행을 주도하고 있는 국제기구인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는 1000달러 또는 1000유로까지만 이를 적용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원화로 150만~170만원 정도입니다. 또 FATF에 서명한 98개국 중 실제 트래블룰 이행 국가는 11개국뿐이고, 우린 이미 100만원 이상으로 FATF 권고보다 광범위하게 신고해 온 모범국가인데, 이걸 또 다시 100만원 미만 모든 거래로 확대하겠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신고 전까지 일률적 거래거절이나 개인지갑 통제와 같은 강제조치는 세계 어디에도 전례가 없습니다.

특히 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인, 1000만원 이상 모든 디지털자산 이전거래를 의심거래보고(STR) 대상으로 의무화하는 조치만 해도 그렇습니다. 의심스러운 STR 검증이라는 실효성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이는 상위법인 특금법 4조1항에 있는 ‘의심거래 보고 의무는 합당한 근거가 있는 경우에만 부과한다’는 규정에 어긋난 것입니다. 법이 규정한 ‘합당한 근거’에 대해 지금의 시행령 안은 명확한 기준 제시 없이 ‘1000만원 이상’이라는 금액으로 답한 겁니다.

지난 윤석열 정부 시절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다수당을 점하고 있다 보니 정부가 ‘시행령 정치’를 일삼았고, 민주당은 국회법을 개정해 정부가 시행령 입법예고 전에 미리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제출하고 그로부터 30일 이내엔 입법예고를 할 수 없도록 하는 법 개정을 시도했었습니다. 이를 두고 거대야당이 삼권분립을 무시하려한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입법 취지를 무시하는 정부의 과도한 시행령 개정을 적절하게 제어해야 한다는 쪽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제 행정부도 입법부도 다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 정부인 만큼, 무리한 시행령 개정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미국 얘기로 돌아가 봅시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렇게 디지털자산과 스테이블코인 규제 입법을 서두르는 것일까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크립토 친화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번 입법 절충안 마련에는 야당인 민주당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미국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디지털자산과 스테이블코인이 미래 금융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동일한 인식을 가진 겁니다. 그리고 한 국가의 규제 큰 그림이 관련 산업을 좌우한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미국만의 일이 아닙니다. 유럽연합(EU)도 자신들의 강한 규제가 지금의 달러 스테이블코인 지배적 상황을 낳았다는 자성 하에 관련 규제를 완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영국조차도 디지털자산업계 제언을 받아 들여 영란은행이 마련했던 스테이블코인 보유 한도와 준비금 예치 관련 가이드라인을 완화하는 쪽으로 재검토하겠다고 한 발 물러섰습니다. 이웃국가인 일본도 디지털자산을 현행 증권법 틀 내에 포지셔닝하는 쪽으로 법적, 제도적 새 판 짜기에 한창입니다.

이 모든 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제 디지털자산은 더이상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정도를 거래하는 시장과 산업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토큰은 물론이고 스테이블코인, 전통자산을 토큰화하는 실물기반 토큰화자산(RWA) 등을 망라하는 거대한 금융거래 인프라입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시장과 산업을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그 전쟁의 승자는 해당 시장과 산업에 친화적인 규제를 가지고 있는 국가에서 나올 것임은 명백합니다.

이제 디지털자산 분야의 성장 여부는 규제당국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시장은 규제가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금융산업 진흥이라는 고민이 없었던 금융당국에게 지금 와서 디지털자산이라는 신산업을 진흥시킬 주체로서의 역할을 요구하는 건 무리입니다. 다만 특정한 산업과 기술 혁신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소비자 보호와 금융시스템 안정을 달성할 수 있도록 규제 범위와 수준, 절차를 유연하게 설정하는 규제 설계를 요구하는 건 당연합니다. 우리 금융당국이 스마트한 ‘규제 설계자’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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