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스시대 통상 규범이 아직도...디지털 조세, 현실 반영 못해"

경제

이데일리,

2026년 5월 18일, 오후 07:19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이 18일 한국공학한림원 포럼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한광범 기자)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팩시밀리 시대’에 머물러 있는 과거의 국제 통상 규범과 조세 체계가 급변하는 정보통신기술(ICT)과 인공지능(AI)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해 글로벌 갈등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돈은 한국에서 버는데 세금은 미국이나 싱가포르에서 내는 등의 조세 왜곡 현상과 글로벌 화상회의 서비스의 데이터 서버 위치에 따른 법적 공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다.

이재민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장은 18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한국공학한림원 주최로 열린 NAEK포럼 기조강연을 통해 “현재의 국제 규범은 1980년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당시의 낡은 틀에 묶여 있다”며 “ICT 기업에 세금을 어떻게 부과해야 하는지가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적 문제지만 관련 규범이 전혀 명확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 원장은 외무고시 출신으로 외교통상부를 거쳐 미국 로펌에서 국제분쟁 전문 변호사로 활동한 국내 최고 권위의 국제통상·경제법 전문가다. 저서 등을 통해 디지털·AI 시대의 새로운 국제법 규범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왔다.

◇“트럼프 관세, 본질은 국가 안보…20년 묵은 다자주의 균열 폭발”

이 원장은 이러한 통상·조세 질서의 혼란이 단순히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으로 갑자기 생긴 돌출 발언이나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미 2005~2006년 무렵부터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균열과 미·중 갈등의 징후가 뚜렷했으며, 지난 20년간 누적된 구조적 모순 위로 디지털 전환과 AI 시대가 급속히 겹치면서 문제가 폭발했다는 분석이다.

이 원장은 “WTO 체제의 무력화와 자유무역협정(FTA)의 균열, 미·중 갈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상황에서 국가 간 전면전이라는 극단적 변수까지 더해졌다”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중동 분쟁처럼 유럽과 대륙을 넘나드는 국가 대 국가의 전면전은 현대 국제통상 질서에서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 못했던 시나리오였으며, 이로 인해 법적 갈등의 깊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고 우려했다.

특히 이 원장은 최근 한국 산업계의 최대 현안으로 부각된 미국의 관세 정책에 대해서도 시각의 전환을 주문했다. 그는 “우리는 흔히 트럼프 행정부가 제시하는 ‘관세율 몇 %’라는 숫자 자체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며 “하지만 실제 미국의 정책 발표문이나 행정명령을 뜯어보면 핵심은 관세율이 아니라 그 저변에 깔린 ‘국가 안보’와 ‘국가 위기’에 대한 언급”이라고 강조했다. 각국이 WTO의 규제를 비껴가기 위해 ‘국가 안보 예외 조항’을 무분별하게 인용하면서 자동차, 반도체에 이어 ICT 분야까지 경제 안보의 논리가 지배하게 됐다는 진단이다.

◇팩스 시대의 조세 시스템…‘돈은 한국서 벌고 세금은 미국에’ 오작동

이 원장은 법규범이 디지털 경제의 확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발생하는 대표적인 부작용으로 ICT 기업들에 대한 국제 조세 체계의 오작동을 예로 들었다. 현행 국제법상 조세 체계는 물리적 거점을 기준으로 설계돼 있어, 국경을 넘나들며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하는 빅테크 기업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돈은 한국에서 버는데 세금은 미국이나 싱가포르에서 내고, 프랑스에서 돈을 번 빅테크가 아일랜드나 미국에 세금을 내는 왜곡된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며 “법이 현실을 못 따라가다 보니 ICT 기업에 대한 국제 조세 체계가 통상 체제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갈등과 혼돈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원장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시작된 1986년 당시 최첨단 교역 상품은 종이 문서를 스캔해 전화선으로 전송하던 팩시밀리(팩스)였다”며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AI와 디지털 대전환이 이뤄졌는데 국제 규범은 여전히 인터넷조차 없던 과거의 틀에 묶여 있으니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스마트폰이나 AI 기반의 디지털 무역은 상상조차 못 하던 시절의 산업 기준을 고수하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데이터 기반의 경제 현상을 글로벌 법과 제도가 전혀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같은 규범의 공백은 비단 세금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일상적인 ICT 서비스 이용에서도 나타난다. 이 원장은 코로나19 이후 일상화된 줌(Zoom) 수업이나 온라인 화상회의를 예로 들며 “온라인으로 회의를 진행할 때 데이터가 저장되는 서버가 미국 등 해외에 있다면 향후 민감한 정보와 관련해 복잡한 법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기존 규범과 디지털 편의성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기업과 개인 모두 이러한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최근 전 세계적인 화두로 떠오른 AI 분야에 대해서도 “현재 국제사회의 논의는 윤리적 이용, 공정한 이용, 개인정보 보호, 기술 표준 등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이제는 이를 실질적인 법적 제도로 구체화하는 ‘제도화 작업’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 대전환 시기를 맞이한 한국 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거의 규범을 단순히 수용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디지털·AI 국제 규범을 만드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1947년 가트(GATT) 체제나 1995년 WTO 체제가 만들어질 때와 달리, 지금의 AI·디지털 분야 규범 수립 과정에서는 한국의 목소리가 반영될 여지가 충분히 크다”며 “새로운 흐름이 올 때 글로벌 표준과 법규범 정비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 우리 의견을 시스템에 반영해 두어야 향후 50년, 100년간 한국 기업들이 유리한 틀 안에서 움직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국내 법 체계의 전면적인 개편도 주문했다. 이 원장은 “현재 우리나라의 산업과학 관련 법률들을 보면 그 시스템이 전부 과거의 ‘47년 체제’나 ‘95년 WTO 체제’에 맞춰져 있다”며 “국가 안보와 경제 안보가 결합된 새로운 체제에 맞춰 국내 법령을 빠르게 정비해야만 지원금 지급이나 과학기술 활동 지원, 나아가 국가 간 갈등 해소에서 더 적극적이고 실효성 있는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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