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자본시장의 시선이 한국에 쏠리고 있다.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팅, 우주·방산 등 유럽이 강점을 가진 원천기술을 실제 제품과 산업으로 확장해 적용하려면 반도체, 메모리, 소재, 배터리, 정밀 제조 등 한국의 기반 산업과 핵심 기술이 연결돼야 한다는 점에서다. 한국을 유럽 딥테크의 핵심 산업 파트너로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이데일리는 최근 프랑스 사모펀드(PEF)운용사 옴네스캐피탈의 미켈 드 랑드(Michel de Lempdes) 매니징디렉터를 만나 유럽 딥테크 투자 전략과 한국 시장 진출 가능성을 들었다. 랑드 매니징디렉터는 “프랑스와 한국은 딥테크라는 새로운 산업혁명을 함께 겪고 있다”며 “양국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무엇보다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옴네스캐피털의 미켈 드 랑드 매니징디렉터는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의 협업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다고 밝혔다.(사진=옴네스캐피털 제공)
◇12조 굴리는 PE가 바이아웃 대신 딥테크 택한 이유
옴네스캐피탈은 프랑스 파리에 본사를 둔 사모펀드 운용사로, 2012년 프랑스 대형 은행 크레디아그리콜(Crédit Agricole)로부터 독립한 뒤 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투자사로 성장했다. 현재 약 70억유로(약 11조9312억원) 규모의 운용자산을 기반으로 인프라와 딥테크 중심의 벤처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23년부터는 바이아웃과 사모신용 전략을 정리하고 재생에너지와 데이터센터, 딥테크 등 연결성이 높은 영역으로 투자 역량을 모으고 있다. 단순히 운용 전략을 줄인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산업의 성장축이 어디서 만들어질지를 다시 정의한 셈이다. 그 중심에 놓인 분야가 딥테크다.
12조원을 굴리는 유럽 사모펀드 운용사가 보는 딥테크에는 어떠한 가능성이 있을까. 랑드 매니징디렉터는 딥테크 투자의 본질을 매출이 아니라 산업의 방향을 먼저 읽는 투자로 설명했다. 소프트웨어 기업처럼 연간반복매출(ARR)이나 고객 지표를 보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영역과 달리, 딥테크는 투자 시점에 매출이 거의 없거나 시장 자체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사례가 방산 드론 투자다. 옴네스캐피탈은 유럽 방산 드론 기업 퀀텀시스템스(Quantum Systems)에 일찌감치 투자했다. 당시 방산은 벤처투자 시장의 주류 테마라기보다 정부 조달과 대형 방산업체 중심의 산업으로 인식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나 옴네스캐피탈은 드론이 정찰과 감시를 넘어 전장의 비용 구조와 작전 방식을 바꾸는 핵심 기술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랑드 매니징디렉터는 “오늘날 모두가 방산을 이야기한다면 투자자로서는 이미 늦은 것일 수 있다”며 “우리의 역할은 시장이 말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 같은 선제 투자 방식은 우주와 양자컴퓨팅 분야에서도 이어졌다. 옴네스캐피탈이 우주기업 더익스플로레이션컴퍼니(The Exploration Company), 양자컴퓨팅 기업 콴델라(Quandela) 등에 투자한 것도 당장의 매출보다 기술 주권과 산업 재편 가능성을 본 결과다. 우주는 발사체와 위성, 궤도 서비스가 결합하는 새로운 인프라 산업으로, 양자컴퓨팅은 향후 보안·소재·신약·AI 연산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기반 기술로 평가된다. 옴네스캐피탈은 아직 시장이 완전히 열리기 전이라도 핵심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향후 산업 생태계의 중심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프랑스는 원천기술, 한국은 산업화 역량…딥테크 협력 뜬다"
랑드 매니징디렉터는 최근들어 한국과의 협업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유럽 딥테크 기업이 세계적 원천기술을 갖고 있더라도 이를 실제 산업으로 확장하려면 반도체, 메모리, 소재, 배터리, 정밀 제조 같은 기반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출발점은 유럽에 있을 수 있지만, 이를 제품화하고 대량생산해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는 한국이 핵심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랑드 매니징디렉터는 한국의 강점을 '기술을 산업으로 바꾸는 힘'으로 정의했다. 그는 "유럽은 훌륭한 과학기술을 갖고 있지만 모든 분야에서 강한 것은 아니다”며 “반도체와 메모리, 소재, 배터리, 정밀 제조처럼 딥테크를 실제 제품으로 구현하는 영역에서는 한국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디스플레이만 보더라도 유럽에는 더 이상 대량 생산을 맡을 주요 플레이어가 없다”며 “한국은 유럽 딥테크 기업들이 사업화 단계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시장”이라고 덧붙였다.
랑드 매니징디렉터는 특히 한국을 유럽 딥테크 기업의 사업개발 파트너로 주목하고 있다. 실제 옴네스캐피탈 포트폴리오 가운데 AI 추론용 칩을 개발하는 한 기업은 삼성의 메모리를 쓰고 있다. 유럽 기업이 원천기술을 갖고 있어도 제품화와 양산 단계로 넘어가면 결국 반도체·메모리·소재 등 한국의 산업 생태계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의 시선은 한국 내 투자처 발굴이나 국내 LP 확보에만 머물지 않는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깊어질수록 유럽과 한국 모두 특정 국가나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랑드 매니징디렉터는 “유럽이 미국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한국도 특정 국가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며 “불확실성이 커지는 세계에서 양쪽 모두 더 다변화된 파트너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옴네스캐피탈은 한국 딥테크 스타트업 투자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유럽 밖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단순한 아시아 거점이 아니라 기술·산업 협력을 만들 수 있는 파트너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랑드 매니징디렉터는 “옴네스가 유럽 밖으로 확장하는 다음 단계에서 한국은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지”라며 “한국에는 훌륭한 딥테크 스타트업이 많고, 시장에 빠르게 대응하는 LP들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딥테크처럼 긴 호흡이 필요한 영역에서 장기적 안목을 가진 투자자가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