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월드컵엔 아틀라스가 주인공"…현대차그룹, 27년 월드컵 마케팅史

경제

이데일리,

2026년 6월 11일, 오전 05:10

[이데일리 이윤화 기자] 1999년 여름, 국제축구연맹(FIFA) 본부가 있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국내 스포츠 마케팅 역사를 바꿔놓을 결정이 내려졌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공식 파트너였던 제너럴모터스(GM) 산하 ‘오펠’이 후원을 포기하면서 생긴 자동차 부문 공석을 놓고 토요타와 맞붙어 현대자동차가 이긴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현대차그룹과 FIFA의 협업 역사는 27년을 이어왔다. 올해 열리는 북중미 월드컵에서 선보일 현대차그룹의 마케팅 메시지는 특별하다. 휴머노이드 로봇을 앞세워 기업의 새로운 도약을 예고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 광고판이 찍힌 월드컵 장면…광고 효과 각인


당시 시가총액으로만 따지면 토요타가 현대차를 90배 이상 압도했다. 북미 자동차 판매 1~2위를 오가던 토요타는 이미 ‘글로벌 브랜드’였고, 현대차는 여전히 ‘싸지만 잘 고장 나는 차’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불리한 조건에도 현대차는 굴하지 않았다. 별도 전담팀을 꾸리고 당시 1년치 광고 예산 2억 달러 중 5000만 달러를 입찰 비용으로 베팅했다. 고(故) 정주영 선대 회장의 “해봤어?”로 상징되는 현대 특유의 불굴의 추진력이었다. 결과적으로 FIFA는 토요타 대신 현대자동차를 공식 파트너로 선택했다. 국내 기업이 FIFA 공식 파트너 반열에 오른 최초의 순간이었다.

1999년 여자 월드컵 미국 대표팀 브랜디 체스테인이 결승골을 터뜨린 뒤 웃통을 벗어던지며 세리머니를 하던 그 순간, 화면 속 배경에 현대차 광고판이 선명하게 찍혔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차 스포츠 마케팅의 효과가 폭발한 건 2002년이다. 한국과 폴란드의 조별 예선 첫 경기, 황선홍 선수의 슈팅이 골망을 흔드는 순간 공이 멈춘 바로 그 지점에 현대차 광고판이 서 있었다. 박지성 선수의 포르투갈전 결승골 뒤편도 마찬가지였다. 고 유상철 선수의 골 세레머니 배경에도 현대차는 빠지지 않았다.

수십 번 되풀이되는 하이라이트 영상 속에서, 전 세계 팬들이 반복해 찾아보는 4강 신화의 순간마다 ‘HYUNDAI’라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각인됐다. 당시 대회 기간 현대차 로고가 화면에 노출된 시간은 경기당 평균 11분 32초, 200여 개국 전파를 타고 누적 12시간이 흘렀다. 광고 효과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50억 달러(한화 약 7조 6000억원)가 넘는다. 투자비에 비해 120배가 넘는 효과였다. 월드컵 전후를 비교하면 현대차 브랜드 가치는 10% 이상 뛰었다. 현대차그룹의 지속적인 상품성 개선 등 다양한 노력이 합쳐진 결과였지만, 월드컵 마케팅의 효과도 무시할 수 없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현대차·기아가 지원한 차량. (사진=현대차그룹)
월드컵 마케팅을 제대로 활용하게 된 현대차는 멈추지 않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총 64경기에서 광고판을 통해 경기당 30초짜리 광고를 3회 집행하며 경기당 평균 15분의 브랜드 노출을 확보했다. 총 42억 회를 기록한 대회 공식 사이트에도 이름을 새겼다. 대표팀 버스를 현대차 브랜드로 랩핑한 것도 이 시기부터다. 전 세계 미디어가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대표팀 버스를 찍어댈 때마다 현대차 로고가 함께 중계됐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에쿠스, 제네시스, 쏘나타, 투싼ix 등 730여 대의 승용차와 100여 대의 버스를 대회 공식 차량으로 제공했다. FIFA 제프 블래터 회장을 비롯해 각국 귀빈이 타는 차가 현대차였다. 여기에 현대·기아 컴포짓 로고가 결합된 대형 데칼을 처음으로 적용하고, 80여명 규모의 긴급 출동 봉사단이 남아공 9개 지역 10개 경기장에서 24시간 대기하며 현장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무렵 세계 자동차 판매 순위에서 현대차그룹은 2000년대 초만 해도 12위권이었으나 2010년 포드를 제치고 5위로 올라섰다. 정몽구 회장이 취임 직후 “10년 안에 글로벌 탑5”라고 선언했던 그 약속이 현실이 된 것이다.

기아 역시 2007년부터 FIFA 파트너에 합류해 2010년 남아공 월드컵부터는 현대·기아가 나란히 공식 후원사로 이름을 올리며 그룹 차원의 마케팅 시너지를 극대화했다. 2022년 카타르 대회는 전환점이었다. 현대차는 아이오닉5, G80 전동화 모델, GV70 전동화 모델, 쏘나타 하이브리드, 코나 하이브리드, 투싼 하이브리드, 일렉시티 버스 등 친환경차 236대를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대회 공식 차량으로 제공했다. 기아 역시 EV6 GT-Line, 쏘렌토 PHEV, 니로 PHEV 등 80대의 친환경차를 납입했다. ‘탄소 중립 월드컵’이라는 FIFA의 비전과 현대차그룹의 전동화 전략이 맞닿는 지점이었고, ‘세기의 골’ 캠페인과 ‘팀 센츄리’ 출범은 환경 메시지를 브랜드 서사로 녹여낸 시도였다.

현대자동차 FIFA 월드컵 2026™ 캠페인 '미래는 지금 여기서부터'. (사진=현대차그룹)


◇2026 북중미 월드컵, ‘아틀라스’가 그라운드 밟는다


11일부터 7월 19일까지 미국·캐나다·멕시코 3개국에서 동시에 열리는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은 참가국이 기존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확대된 역대 최대 규모의 대회다. 이 무대에서 현대차그룹은 27년 마케팅 역사를 통틀어 가장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자동차 대신 로봇을 앞세우기로 한 것이다.

보스턴다이나믹스의 4족 보행 로봇 ‘스팟’ 4대는 이미 FIFA 보안팀에 공식 인도됐다. 댈러스 국제방송센터(IBC)와 뉴욕·뉴저지 스타디움 등 주요 거점에서 자율 순찰과 모니터링, 관람객 안내 업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올해 초 CES 2026에서 처음 공개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도 월드컵 무대에 선다.

아틀라스가 어떤 퍼포먼스를 선보일지 FIFA와 현대차 측은 아직 공식 발표를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개막식이나 주요 행사에서 축구공을 활용한 퍼포먼스를 펼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아틀라스는 최근 축구의 고난도 기술인 ‘고스트 라보나 킥’까지 성공적으로 소화한 바 있다.

아틀라스의 축구 학습은 단순한 이벤트용 퍼포먼스가 아니다. 현대차와 보스턴다이나믹스 연구진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려면 균형·타이밍·협응·적응 네 가지 능력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고 봤다. 이를 훈련시키기에 축구만큼 적합한 환경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스트 라보나 킥은 이 기술력의 정점이다. 기존 라보나 킥에 수비수를 속이는 페인트 동작을 더한 이 기술은 빠른 방향 전환과 공중에서의 균형 유지, 킥 순간의 강한 힘 전달이 동시에 요구된다. 연구진은 이 복합 동작이 향후 물류·제조 현장에서 로봇이 물체를 다루고 이동하는 작업 능력으로 직결된다고 설명한다. 축구는 곧 산업 현장을 위한 연습이기도 한 셈이다.

현대차그룹의 2026 월드컵 캠페인 슬로건은 ‘넥스트 스타트 나우(Next Starts Now, 미래는 지금 여기서부터)’다. 아틀라스가 올해 캠페인의 얼굴인 것은 당연하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이번 여름 북중미의 그라운드에서 아틀라스가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 세계는 또 한 번 현대차그룹의 미래 비전에 주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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