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 법률) 시행을 하루 앞둔 지난 3월 9일 서울 거리에서 택배 기사들이 배달을 하고 있다. 원청 기업과 하청 노동자 간 교섭을 가능하게 하고, 노동자의 파업 등 쟁의행위로 생긴 손해배상 범위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 시행에 따라 대부분 개인사업자 신분인 택배·플랫폼 노동자들도 원청 상대로 교섭을 요구할 수 있게 됐다.© 뉴스1 최지환 기자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 시행 100일(오는 17일)을 앞둔 상황에서 지방노동위원회가 원청 사용자성 사건의 86%에서 원청이 하청 노조와 직접 교섭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안전과 작업환경 등 하청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대해 원청이 실질적인 영향력과 결정권을 행사하는 '실질적 지배력'이 확인되면, 직접 고용 관계가 없더라도 원청을 노사관계법상 사용자로 인정하는 '사용자성' 판단이 잇따르면서 원·하청 노사관계의 경계도 빠르게 재편되는 모습이다.
현재 원청 사용자성 판단을 기다리는 사건만 350여 건에 달하는 만큼 노동위원회의 이 같은 판단 기조가 유지될 경우 원청의 교섭 책임 범위는 더욱 확대되고 산업 현장의 파장도 한층 커질 전망이다.
14일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지난 3월 10일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이달 5일까지 하청노조 1137곳(조합원 16만 1830명)이 원청 431곳을 상대로 교섭을 요구했다. 이 가운데 원청 기업의 '사용자성'을 판단해달라며 지방노동위원회에 접수된 사건은 80건이다. 지노위는 이 중 69건(약 86%)에 대해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고 교섭에 응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산업안전과 근로 조건, 임금 등 여러 교섭 의제 중 한 가지만 사용자성이 인정돼도 원청 기업이 하청 노조와 교섭해야 할 '진짜 사장'이라고 본 셈이다.
© 뉴스1 양혜림 디자이너
사용자성 인정 사례…"산업안전 실질 통제하면 원청도 사용자"
국민의힘 조지연 의원실이 중노위에서 받은 16건의 판정문을 확보해 <뉴스1>이 분석한 결과, 지노위는 대체로 노조가 요구한 교섭 의제 중하나라도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되면 사용자로 볼 수 있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렸다.
원청 사용자성 인정의 핵심 기준은 산업안전 분야에 대한 '실질적·구체적 지배력' 여부다. 단순히 도급계약을 체결한 발주자라는 이유만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원청이 하청 노동자의 안전 관련 근로조건을 실제로 결정·통제할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대표적으로 포스코이앤씨 건설현장 사건에서 경북지노위는 △원·하청 노동자가 동일 작업공간에서 일하고 △원청이 공정과 작업방식을 직접 지시·감독하며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총괄 운영하고 △산업안전보건관리비의 편성·집행 권한까지 보유한 점을 근거로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했다. 하청이 산업안전 관련 근로조건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기 어렵고, 실질적 권한은 원청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포스코 사내하청 사건에서도 비슷한 논리가 적용됐다. 지노위는 원청이 제조실행시스템(MES)을 통해 작업을 관리하고, 위험성 평가·안전보건협의체 운영·합동점검·작업중지권 관리 등을 주도하며, 제철소 내 시설과 설비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다고 봤다. 특히 출입 승인, 안전규정 위반자 출입 제한, 작업 허가 및 공정 조정 권한 등을 행사하는 점을 들어 산업안전 의제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인정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사용자성을 인정한 인천지노위도 "산업안전 의제에 대한 사용자성이 인정됐기 때문에 나머지 교섭 의제에 대한 사용자성 인정 여부는 살펴볼 필요가 없다"고 적시했다. 공사 측이 "임금, 인사, 근로시간 등 개별 근로 조건에 대해서는 사용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최근 결정례는 '안전 관련 예산, 작업 허가, 공정 조정, 출입 통제, 안전규칙 운영 등 산업안전 전반에 대해 원청이 실질적 통제권을 행사한다면 사용자성이 인정된다'는 방향으로 수렴하는 모습이다. 아울러 노조가 제기한 여러 교섭 의제 중 일부에 대해서만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돼도 교섭의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힌다.
중앙노동위원회. 2025.11.28 © 뉴스1 김승준 기자
사용자성 불인정 가능 사례…"법정 의무 이행만으로는 부족"
반대로 지노위가 제시한 판단 기준을 종합하면, 원청 사용자성이 부정될 가능성이 높은 경우도 드러난다.
우선 원청이 단순히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 또는 발주자로서의 법정 의무만 이행했을 뿐, 실제 작업방식이나 안전 관련 근로조건을 결정하지 않는 경우다.
포스코 사건에서 회사 측은 "도급인으로서 법률상 의무를 수행한 것을 실질적 지배력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고, 건설공사 사건에서도 "관련 법령 준수를 요구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며 사용자성을 부인했다.
또 △하청업체가 안전관리 계획 수립, 인력 운영, 작업방법 결정 등을 독자적으로 수행하고 △원청이 인사·징계·근태관리 등에 관여하지 않으며 △안전 관련 예산이나 시설 운영에 대한 실질적 결정권도 갖지 않는다면 사용자성 인정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지노위도 원청의 교섭의무는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영역'에 한정하며, 하청의 고유한 인사권·징계권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최근 결정례를 종합하면 원청이 안전 문제를 실질적으로 통제할 경우 사용자성이 인정될 가능성이 높지만, 단순히 법정 관리·감독 의무를 수행한 수준에 그친다면 사용자성 인정은 제한적일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노사 모두 불복 '재심 19건'…하반기 중노위 판정이 분수령
원청의 사용자성을 둘러싼 논란은 앞으로 더욱 커질 전망이다. 지노위 판정에 불복해 중노위에 재심을 신청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현장의 혼란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중노위에 접수된 재심 사건은 19건에 달한다. 불복 주체도 사용자 측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사용자성이 인정된 사건에서는 기업이, 반대로 인정되지 않은 사건에서는 노동조합이 재심을 청구하는 등 노사 양측 모두 지노위 판단에 강하게 반발하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노동위원회가 산업안전 의제만으로도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경향을 보이는 데 주목한다. 노란봉투법상 노조가 제기한 여러 교섭 의제 가운데 단 하나라도 사용자성이 인정되면 원청은 교섭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구조가 산업 현장의 부담을 키울 수 있다고 우려한다. 산업안전 문제를 중심으로 교섭이 시작되더라도 실제 교섭 과정에서는 임금과 성과급, 복리후생 등 다른 근로조건으로 논의가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봉수 강남노무법인 노무사는 법 시행 후 지노위가 내린 이 같은 판단에 대해 "현재는 사례가 많지 않아 논란이 있지만 노동위원회와 법원의 판단이 축적되면 점차 기준이 명확해지고 제도도 안정적으로 정착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당해고 사건도 초기에는 해석 논란이 많았지만 판례가 쌓이며 기준이 정립됐듯, 노란봉투법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법 적용 범위와 사용자성 판단 기준이 구체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uni1219@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