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의 평화 협정으로 중동발 에너지 위기는 일단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한국 경제에는 무거운 과제를 남겼다. 원유 수입의 7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는 에너지 구조와 외부 변수에 취약한 내수 기반이 다시 한번 확인되면서 공급망 다변화와 에너지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6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배럴당 81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 2월 말 중동전쟁 발발 이후 한때 배럴당 110달러를 넘어서기도 했으나, 종전 합의 소식에 유가가 빠르게 안정세를 되찾는 모습이다. 두바이유도 배럴당 85달러 아래로 내려왔다.
앞서 미국과 이란이 전격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이란은 오는 19일로 예정된 종전 양해각서(MOU) 서명식 이후 호르무즈 해협을 재개방하기로 했다.
비용·설비에 막혔던 '탈중동' 30년 과제…"수입선 다변화·비축유 확대 필요"
유가는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지만, 중동전쟁발 에너지 위기는 공급망 다변화라는 큰 숙제를 남겼다. 2025년 기준 한국의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은 70.7%이며, 이 중 99%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들어온다. 업계에서는 이번 봉쇄 국면이 장기화됐다면 국내 경제가 훨씬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공급망 다변화는 수십 년째 해결 못 한 숙제다. 한국의 대중동 원유 수입 비중은 2015년 82.3%에서 2021년 59.8%로 6년간 약 22.5%포인트(p) 줄었으나, 2023년 71.9%까지 다시 상승한 뒤 최근 3년 연속 70% 안팎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다변화가 쉽지 않은 데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중동산 원유는 다른 산유국 대비 배럴당 1.12달러(2025년 기준)의 수송 비용 절감 효과가 있는 데다, 국내 정유설비가 중동산 중질·고황 원유 처리에 특화된 고도화 설비 중심으로 구축돼 있어 다른 유종 도입 시 수익성이 저하된다. 또 에쓰오일처럼 사우디 아람코가 최대주주로 참여해 '지분 투자-공급 계약'이 결합된 사업 구조 역시 단순한 수입선 전환을 어렵게 한다.
비축유 현황도 숫자만 보면 양호하지만 실질적인 대응 여력을 따져보면 사정은 다르다. 정부 전략비축유 1억 배럴, 민간 비축유 9000만 배럴로 총 1억 9000만 배럴을 보유해 국제에너지기구(IEA) 기준 비축일수는 208일로 주요 비산유국 중 가장 많다. 그러나 수출 물량을 제외한 실제 국내 하루 소비량 기준으로 따지면 약 70일분 수준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비중동 지역과의 장기 공급 계약 체결, 정유 설비 유연화, 도입선 다변화 지원제도의 실효성 강화를 병행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이미 원유 도입선 다변화 지원제도의 일몰 시점을 2027년까지 3년 연장했지만, 중동 의존도를 구조적으로 낮추려면 정유 설비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가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글로벌경쟁전략연구단장은 "중동 비중을 획기적으로 줄이기는 어렵겠지만 점진적으로 축소되는 방향은 맞다"며 "미국·캐나다·아프리카·동남아 등으로 수입선 다변화가 진행 중인 만큼 비축 용량 확대도 함께 추진해야 충격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호르무즈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종전 이후에도 계속해서 변할 가능성이 크다"며 "경질유 처리가 가능한 정유 설비 투자에 정부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14일 서울 시내의 한 주유소에 유가정보가 표시돼 있다. 2026.6.14 © 뉴스1 이호윤 기자
외부변수 취약한 내수구조…에너지 전환 가속화도 필수
에너지 전환 속도를 높이는 것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원유 의존도를 구조적으로 낮추지 않으면 지정학적 위기에 또다시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 중동전쟁을 계기로 재생에너지 전환과 원자력 활용 확대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부각됐다.
정부는 이번 위기를 계기로 에너지 구조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에너지 대전환 추진계획'을 바탕으로 2030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20% 이상(100GW)으로 끌어올리고, 석탄발전소 60기를 2040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지하며 산업·수송·난방 전 영역의 전기화·탈탄소화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중장기 비축 역량 확보에도 나섰다. 중동전쟁 추경 예산을 활용해 석유 비축기지 용량을 2000만 배럴 확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확대된 용량은 산유국 석유를 국내 유휴 비축시설에 보관해주고 비상시 우선구매권을 얻는 국제공동비축사업에 활용할 방침이다.
아울러 지난달 한·일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원유·석유제품 스와프 및 상호 공급, 원유 조달·운송 분야 협력을 중심으로 한 민관 대화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근본적인 과제는 내수 기초체력 확보다. 유가가 상승하면 기업 생산 비용이 늘고 제품 가격이 오른다. 국제 정세 불안은 위험자산인 원화 약세로 이어지고, 수입 물가 상승 등 내수 기반이 흔들리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의 특성상 불가피한 부분이 있지만, 외부 충격을 완충할 내수 시장의 취약성이라는 구조적 한계가 이번에도 드러났다는 평가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쟁이 끝났더라도 생산 시설 파괴 등으로 유가가 당분간 70~80달러대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며 "단기적으로는 수입선을 다변화해 위기 시 미국산 원유를 즉각 활용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장기적으로는 나프타 등 원유에서만 생산하던 제품들을 친환경 소재로 대체하고, 원유의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는 등의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min785@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