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종이 없는 무역’의 성패는 신뢰 인프라에 달렸다

경제

이데일리,

2026년 6월 19일, 오후 04:12

이영준 모두싸인 대표
지난 6월 1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한-EU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과 유럽연합(EU)은 디지털통상협정(DTA)에 공식 서명했다. 디지털 교역을 활성화하고, 국경을 넘는 디지털 경제 협력을 확대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최근 수년간 한국의 전자상거래 수출이 빠르게 성장해 온 흐름을 고려하면, 이번 협정은 한국 기업의 글로벌 디지털 교역 환경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이번 협정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디지털 통상이 더 이상 부수적인 의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존 통상 협정에서 디지털 관련 조항이 제한적으로 다뤄졌다면, 이번 DTA는 디지털 교역 전반에 필요한 규범을 폭넓게 포함하고 있다. 데이터 이동, 전자거래, 소비자 보호, 온라인 신뢰 환경 등 디지털 경제의 기반을 이루는 요소들이 통상 규범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대목은 전자문서와 전자서명의 법적 효력 및 증거능력에 관한 내용이다. 전자적 형태라는 이유만으로 문서나 서명의 법적 효력을 부인해서는 안 되며, 당사자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향후 상호 인정 가능성을 위해 협력한다는 방향이 담겼다. 이는 디지털 환경에서 이뤄지는 계약과 합의가 국경을 넘어 더 넓게 인정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러한 흐름은 기업 계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국제 외교 현장에서도 원격·전자서명 방식의 합의가 보도될 만큼, 전자적 방식의 합의 체결은 더 이상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명 방식의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국경과 제도 차이를 넘어 그 합의의 진정성과 무결성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다.

하지만 법적 효력을 인정한다는 선언만으로 디지털 거래의 신뢰가 자동으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기업 간 거래에서는 계약 체결 이후에도 다양한 분쟁 가능성이 존재한다. 누가 서명했는지, 언제 동의했는지, 어떤 문서에 합의했는지, 서명 이후 문서가 변경되지는 않았는지 등을 제3자가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디지털 통상 시대의 핵심은 종이를 없애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국경을 넘어 이뤄진 전자적 합의를 어떻게 신뢰하고,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에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자서명에 대한 흔한 오해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전자서명은 단순히 문서 위에 사인 이미지를 얹는 기능이 아니다. 표면적인 전자서명 기능을 구현하는 일은 과거보다 훨씬 쉬워졌지만, 기업의 중요한 계약이나 국가 간 거래, 분쟁 가능성이 있는 상거래에서 필요한 것은 ‘서명 이미지’가 아니라 ‘검증 가능한 신뢰’다.

검증 가능한 신뢰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요소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서명자의 신원 확인, 서명 의사 확인, 문서의 원본성 보존, 위·변조 여부 검증, 감사추적 로그, 장기 보관과 증거 제출 가능성 등이 모두 필요하다. 이러한 요소들이 갖춰져야 전자서명은 단순한 업무 편의 기능을 넘어 법적·기술적 신뢰를 갖춘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유럽 시장은 이러한 흐름을 제도적으로 앞서 체계화해 왔다. EU의 eIDAS 규정은 전자서명을 신뢰 수준에 따라 구분하고, 전자본인확인과 인증, 신뢰서비스의 법적 틀을 마련해 왔다. 전자서명이 전자적 형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적 효력을 부인받지 않도록 하면서도, 더 높은 수준의 신뢰가 필요한 거래에서는 보다 엄격한 신원 확인과 무결성 검증이 요구되는 구조다. 이는 글로벌 디지털 무역에서 전자서명이 단순한 편의 기술이 아니라 법과 기술이 결합된 신뢰 체계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한국 기업이 디지털 통상 시대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전자계약을 단순한 업무 효율화 도구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얼마나 빠르게 서명하느냐를 넘어, 얼마나 신뢰할 수 있게 증명하느냐에서 갈릴 것이다. 계약 당사자가 서로 다른 국가에 있고, 적용 법제가 다르며, 거래 규모가 커질수록 이러한 신뢰 인프라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번 한-EU DTA는 전자계약 산업에도 분명한 과제를 던진다. 시장은 이제 단순한 ‘전자서명 도구’를 넘어, 국경을 넘어 통용될 수 있는 신뢰 인프라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단기간에 만들어지는 기능의 문제가 아니다. 법제와 규제에 대한 이해, 글로벌 표준에 대한 대응, 보안과 인증에 대한 장기 투자, 그리고 실제 분쟁 상황에서도 입증 가능한 데이터 구조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모두싸인 역시 이 변화를 단순한 시장 확대가 아니라 책임의 확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전자계약은 더 이상 종이 계약을 대체하는 보조 수단에 머물지 않는다. 디지털 통상과 글로벌 비즈니스가 확장될수록 전자계약은 기업 간 신뢰를 연결하는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국경을 넘어 더 안전하고 빠르게 거래할 수 있도록, 전자서명을 ‘사인 이미지’가 아닌 신뢰 가능한 기술 인프라로 고도화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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