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리커머스, 순환경제의 새 엔진

경제

이데일리,

2026년 7월 07일, 오전 11:10

[이신애 글로벌리커머스산업협회장] 지난 5월, H&M·빈티드·베스티에르 콜렉티브·디팝 등 세계 패션·유통 기업 70여 곳이 EU·미국·캐나다 정부에 공동 성명을 냈다. 리커머스(중고거래) 산업을 키울 정책을 만들라는 요구였다. 이들은 지금의 경제 구조가 기존 제품을 다시 쓰기보다 새 제품을 사도록 설계돼 있다며, 리커머스를 미래 성장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이신애 글로벌리커머스산업협회장. (사진=글로벌리커머스산업협회)
이신애 글로벌리커머스산업협회장. (사진=글로벌리커머스산업협회)
그동안 리커머스는 유통의 틈새 시장이나 자원순환 관점에서 주로 다뤄졌다. 하지만 세계 시장은 이제 리커머스를 새로운 경제 성장 동력으로 본다. 이번 성명을 이끈 순환경제 분야 글로벌 비영리 재단 엘렌 맥아더 재단의 보고서가 이를 잘 보여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적절한 정책 지원이 뒷받침될 경우 재판매 사업의 매출총이익률은 최대 55%, 수선 사업은 약 41%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중고 패션 시장은 2030년 393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전망인데, 이는 전체 패션 산업 성장률의 2배에 달한다.

눈여겨볼 것은 기업들이 요구한 정책의 방향이다. 이들은 정부에 세 가지를 촉구했다. 첫째, 중고거래와 수선 서비스에 붙는 부가가치세·판매세 부담을 낮춰달라는 것이다. 이미 세금을 다 낸 제품인데 재판매될 때마다 세금이 다시 붙는 구조는 순환경제의 가격 경쟁력을 갉아먹는다.

둘째, 리커머스 일자리에 대한 세제 지원이다. 검수·분류·수선·물류까지 리커머스는 손이 많이 가는 산업이다. 환경적으로는 바람직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불리한 구조인 만큼, 관련 고용에 대한 노동세 인하와 세액공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를 활용해 회수·분류 인프라 재원을 마련하자는 제안이다. 생산자가 선형 생산의 실제 비용을 더 많이 부담하게 해 재사용 인프라의 토대를 넓히자는 취지다.

엘렌 맥아더 재단은 이를 ‘경제적 함정(economic trap)’이라 부른다. 지금의 제도가 ‘만들고 쓰고 버리는’ 경제에 맞게 짜여 있어 새로 만드는 것이 다시 쓰는 것보다 늘 싸게 먹히는 구조라는 뜻이다. 이 함정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번개장터 등 국내 리커머스 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재판매마다 반복되는 과세, 검수·수선에 드는 노동 비용, 재사용 제품의 품질을 보증할 공인 인증 체계의 부재가 발목을 잡는다.

특히 인증 체계가 없다 보니 국내 기업들은 신뢰를 쌓기 위해 검수·인증 비용을 오롯이 스스로 떠안아야 한다. 개별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전체가 재사용에 불리하게 설계된 탓이다. 주요국이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해 제도 정비에 속도를 내는 사이, 한국의 논의는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어 안타깝다.

리커머스는 단순히 물건을 다시 파는 산업이 아니다. AI 기반 상품 검수와 신뢰 시스템, 가격 예측, 새로운 방식의 물류까지 다양한 신산업을 함께 키운다. 노동집약적 특성 덕분에 검수·분류·수선·물류 영역에서 지역 기반 일자리를 만드는 효과도 크다. 글로벌 보고서들도 리커머스를 제품 재사용 과정에서 지역 고용을 창출하는 산업으로 평가한다.

더 큰 그림은 국가 경쟁력이다. 세계는 이미 ‘더 많이 생산하는 경제’에서 ‘더 오래 쓰는 경제’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유럽연합은 미판매 의류 폐기를 금지하고 디지털제품여권 제도를 도입하며 재사용을 제도화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도 리커머스를 미래 수익원으로 키우겠다며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리커머스는 불황기에만 반짝하는 대체시장이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순환경제의 핵심 산업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소비자의 자발적 참여를 넘어,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제도를 설계하는 정부의 역할이다. 한국도 리커머스를 국가 성장전략의 한 축으로 삼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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