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고객들, 공급망 안정성 원해”
최태원 회장은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SK하이닉스 나스닥 상장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메모리 공장을 지으려면 전력과 초순수, 대규모 부지 등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며 “그런 조건을 갖춘 곳이라면 미국이든 세계 어느 나라든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은 어느 국가인가보다 공급 능력을 얼마나 빨리 확보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SK하이닉스 나스닥 상장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SK하이닉스 제공)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최근 용인 클러스터와 청주, 호남권 등을 중심으로 1100조원에 달하는 국내 투자 계획을 발표하면서, 미국 정부의 투자 확대 요구가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반도체 관세 등을 협상 카드로 현지 생산 확대를 압박할 수 있다는 전망 역시 적지 않다. 실제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최근 미국 마이크론의 신규 공장 콘크리트 타설 기념식 현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생산 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며 “마이크론이 앞장서고 있으니 경쟁자들은 질투심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최 회장은 또 주요 빅테크 고객사들의 미국 내 투자 요청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는 “미국은 가장 큰 시장이고 주요 고객들도 대부분 이곳에 있다”며 “고객들은 공급망 안정성을 원하고 있고 미국에 생산시설을 갖춰주기를 희망하는 목소리가 많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현재 SK하이닉스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직접 수출지는 주로 대만이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TSMC가 이를 받아서, HBM을 탑재한 엔비디아, AMD 등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만든다. 이는 다시 인공지능(AI) 서버 기업들로 수출된다. 그런데 SK하이닉스가 미국에서 직접 HBM을 만들고 미국 투자를 확 늘리고 있는 TSMC와 미국 내에서 협업한다면, 주요 고객사인 빅테크들은 지정학 우려 같은 예기치 못한 공급망 리스크를 피할 수 있다.
실제 아마존,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 오라클 등 미국 주요 하이퍼스케일러(대규모 AI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은 사모 대출과 회사채 발행 등으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빅테크들의 AI 투자 경쟁이 글로벌 산업계 전반을 강타하고 있다는 뜻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들 5대 하이퍼스케일러는 최근 5년 동안 AI 사업 투자를 위해 약 3500억 달러(약 526조원)의 부채를 추가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가운데)이 임원진들과 함께 나스닥증권거래소에서 상장 기념 오픈벨을 누르고 있다. (사진=나스닥 제공)
최 회장은 다만 미국 투자가 한국 투자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AI 메모리 수요가 워낙 폭발적인 만큼 한국 생산분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최 회장은 “미국에 공장을 짓는다고 해서 한국에 있는 생산시설을 줄여서 옮기는 제로섬 게임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AI 시대가 메모리 성장 국면을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반도체 산업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며 “예전과 똑같은 반도체 사이클로 움직인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과거만 해도 PC, 스마트폰 등의 재고를 통해 메모리 호황과 불황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업계에서는 ‘월드컵 주기’라는 말도 많았다. 그런데 AI 등장으로 데이터센터 등의 수요가 폭발하면서 메모리 산업을 보는 시각 자체가 바뀌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최고경영자(CEO)는 “AI 인프라 구축이 인터넷 인프라 확장과 비슷한 경로를 밟는다면 AI 메모리 반도체 호황은 수십 년간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찾는 메모리를 얼마나 빠르게 공급할 수 있을 지가 AI 시대의 가장 큰 과제라는 게 최 회장의 판단이다.
최 회장은 그 연장선상에서 ‘속도전’을 강조했다. 그는 “지금은 과거보다 10배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며 “AI 시대의 가장 어려운 숙제는 스피드”라고 말했다. 이어 “단순히 메모리 반도체를 잘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AI 기술에 더 많이 접근하고 새로운 기술 옵션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를 훨씬 빠르게 해야 한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