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훈 산업1부 부국장
당시 회사에서 사용하던 기사입력기가 불편해 개선을 건의했지만 사내 개발자들이 내놓는 답은 매번 “불가능하다”였다. 답답한 마음에 개발자 친구에게 정말 불가능한 일인지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 저랬다.
친구가 그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만 했다면 사내 담당자를 다시 찾아가 가능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친구의 연락처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는 말에 오히려 희망을 걸었다. 지금 처리해야 할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끝나면 기사입력기도 고쳐줄 것이라고 믿었다. 개선된 기사입력기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3년쯤 뒤였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서막은 지난해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문제를 설명하면서 “꼭 거기에 있어야 할지”, “지금이라도 전기가 많은 지역으로 옮겨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정부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호남이나 새만금으로 이전하려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논란을 불렀다. 이후 청와대가 “기업 이전은 기업이 판단할 문제”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공장을 지방으로 옮기는 방안은 검토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으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광주·전남 행정통합과 6·3 지방선거가 맞물리면서 반도체 공장 유치론은 다시 등장했다. 민주당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 후보 경선 과정에서 대기업 반도체 팹 유치가 주요 공약으로 제시됐고, 광주 지역 정치인들도 패키징이나 후공정에 그치지 않고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는 전공정 팹을 유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업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미 용인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조성하는 상황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호남에 또 다른 반도체 공장을 짓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전력과 용수, 전문인력, 소재·부품·장비 협력업체를 새로 갖춰야 한다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당시만 해도 호남 반도체 공장은 안 하는 사업이라기보다 못 하는 사업에 가까워 보였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전후해서다. 이 대통령은 기업들에 가급적 지방에 투자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역 정치권의 공약에 머물던 반도체 공장 유치론이 국가 산업정책의 하나로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기업들의 반응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분위기에서 “검토하고 있다”는 입장으로 한발 나아갔다. 최소한 못 하는 일에서 아직 하지 않고 있는 일로 바뀐 셈이다.
처음에는 용수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은 패키징이나 후공정 시설을 짓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는 듯했다. 그러나 6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논의는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는 전공정 팹으로 확대됐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방 반도체 클러스터 논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밝혔고, 강기정 당시 광주시장은 설계와 생산, 후공정을 모두 포함하는 ‘종합 세트’가 될 것이라며 한발 더 나아갔다.
그리고 6월 말 삼성과 SK는 장기 국내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호남에 약 800조 원을 투자해 각각 2기씩, 모두 4기의 반도체 팹을 건설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검토 대상조차 아니었던 호남 전공정 공장이 국가적 프로젝트로 바뀐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흔히 기술적 판단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선순위와 비용, 의지에 대한 표현인 경우가 많다. 조건이 바뀌면 불가능의 경계도 움직인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가 가능해진 것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나 정치적 압박 때문만은 아니다. 정부는 전력과 용수가 부족하다는 지적에 공급 방안을 제시했고, 서남권의 재생에너지를 활용하면 기업의 당면 과제인 RE100 대응에도 유리하다고 설득했다. 수도권은 부지와 전력, 용수 측면에서 추가 확장에 한계가 있다는 현실도 제시했다.
기업의 조건도 달라졌다. AI 메모리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늘면서 용인 이후의 새로운 생산기지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 앞당겨졌다. 정부가 기업에 떠넘긴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국가균형발전이라는 정책적 필요와 기업의 생산능력 확대 필요가 맞아떨어졌다.
기업이 처음부터 틀렸던 것도 아니고, 지역 정치권이 처음부터 옳았던 것도 아니다. 초기에는 전력과 용수, 인력과 공급망이 부족했기 때문에 경제성이 없었다. 그러나 정부가 인프라를 책임지고 기업의 추가 투자 필요성이 커지면서 계산이 달라졌다. 불가능했던 사업이 어느 날 갑자기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조건들이 하나씩 바뀐 것이다.
이 대목은 과거와 다른 점이다. 최소한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기업에 희생만을 요구하던 방식은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는 수백조 원 규모의 투자를 끌어낼 수 없다. 기업에도 이익이 되고 국가 산업전략에도 부합해야 한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는 정치적 구호와 기업의 사업성이 접점을 찾은 보기 드문 사례다.
삼성과 SK의 투자계획 발표 이후 이 대통령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90도 '폴더 인사'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고마움의 인사로 공장이 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전력과 용수, 공장 부지는 아직 현실이 아니라 계획이고 약속이다. 수백조 원이라는 투자액도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 집행될 숫자다. 반도체 경기가 달라지거나 정권이 바뀌면 계획이 흔들릴 수 있다는 시장의 의구심도 가볍게 볼 수 없다.
불가능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전력망과 용수관로, 산업용지와 인력 양성, 인허가와 공사 일정이라는 실행의 문제로 모습을 바꿨을 뿐이다.
기사입력기를 고치는 데 3년이 걸렸던 이유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해서가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의 순서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도 같은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 "하겠다"는 약속이 몇 년 뒤 "못 했다"는 변명으로 바뀌는 순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안 되는 일이었던 게 아니라, 끝까지 하지 않은 것이라고.
mhsuh@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