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팀의 안내를 받은 박 과장은 퇴직연금 사업자 앱을 켰습니다. 하지만 화면을 켠 순간, 그는 숨이 턱 막힙니다. 화면 가득 깨알 같은 글씨로 수백 개의 실적배당상품 리스트가 쏟아집니다. ‘미국 성장주 헤지형? 언헤지형? 채권 혼합형? TDF 2050?’ 도무지 알 수 없는 암호문 같은 용어들이 춤을 춥니다. 박 과장은 본업에서는 유능한 엔지니어지만, 금융 용어 앞에서는 작아집니다. 하나하나 검색해 볼 시간도 부족합니다. 행여 잘못 골랐다가 원금이라도 손실이 나면 노후 자금이 줄어들까 덜컥 겁이 납니다.
이것은 과연 박 과장만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수백만 DC 가입자가 겪고 있는 ‘선택의 딜레마’입니다.
전문가의 일을 비전문가에게 떠넘긴 구조
한국형 퇴직연금, 특히 DC(확정기여형, 회사가 매달 일정한 퇴직금을 계좌에 넣어주면 근로자가 알아서 직접 굴려야 하는 제도)가 가진 구조적 모순은 자산 운용 상품 선택이라는 고도로 전문적인 판단을 비전문가인 개인에게 전적으로 떠넘긴다는 점입니다. 자산 운용은 글로벌 경제 흐름을 읽고, 금리를 예측하고, 기업의 가치를 분석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돈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비용을 지불하고 전문가의 조언을 구합니다. 그런데 정작 더 보호가 필요한 일반 직장인들은 본업에 바쁜 와중에도 아무런 조력자 없이 “스스로 공부해서 상품을 고르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이것은 ‘선택의 자유’를 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선택을 시스템으로 막아버린 ‘선택의 제한’입니다. 근로자의 선택권은 이론적으로 세 가지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직접 선택’, 전문가에게 운용을 통째로 맡기는 ‘위임 선택’, 그리고 집단 전체의 이익을 고려해 최적화된 결정을 그대로 따르는 ‘집단 선택’. 해외의 여러 제도는 신규 가입자에게 수백 개의 상품 중에서 ‘직접 선택’하게 하는 대신, 전문가가 엄선한 서너 개의 핵심 포트폴리오만 추천하고 그중에서 고르게 합니다. 반면 한국 근로자에게 법적으로 허용된 선택은 오직 첫 번째, “혼자 알아서 고르는” 선택뿐입니다. 병사들을 충분한 훈련 없이 전쟁터에 보내면서 “처음 보는 무기들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서 싸우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공포가 만든 도피처 — ‘원리금보장의 늪’
행동경제학에는 ‘손실 회피(Loss Aversio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사람은 이득의 기쁨보다 손실의 고통을 더 크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금융 지식이 부족하거나 정보가 불확실할수록 이 공포는 커집니다. 수백 개의 펀드 목록 앞에서 개인이 느끼는 감정은 ‘투자의 기회’가 아니라 ‘실패의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가장 안전해 보이는 원리금보장 상품이라는 벙커로 도피합니다.
통계는 이 현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한국 퇴직연금 적립금의 80%가 넘는 돈이 원리금보장 상품에 묶여 있습니다. 미국이나 호주의 근로자들이 제도의 지원을 받아 주식형 상품으로 자산을 불려 나갈 때, 우리는 시스템의 부재 속에서 원금 손실이 두려워 스스로를 저수익의 감옥에 가두게 된 것입니다. 당장은 안전해 보이지만,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자산 가치는 서서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산 관리의 양극화 — 시스템의 부재가 낳는 격차
아이러니하게도, 자산 규모가 큰 계층은 전문가에게 ‘위임’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자신의 자산을 불려 줄 최고의 전문가를 고르고, 그들에게 운용을 맡깁니다. 반면 자산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시간이 없는 일반 근로자들은 제도적으로 ‘직접 선택’을 강요받는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도와줄 전문가 구조는 아직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고, 믿고 맡길 자동항법 장치(디폴트옵션)도 아직 미성숙하니,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금융 지식 격차가 고스란히 노후 자산의 격차로 이어질 위험이 큽니다.
선택권을 뺏는 것이 아니라, 짐을 덜어주는 것
이제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투자는 어렵고, 우리는 바쁩니다. 근로자에게 필요한 것은 난해한 펀드 리스트를 나열하고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금융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나보다 더 똑똑한 시스템이 알아서 내 돈을 불려주는 ‘자동항법 장치’가 필요합니다. 나 대신 고민하고 나 대신 운용해 줄 든든한 대리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앞으로 이 책에서 다룰 ‘디폴트옵션(선택을 하지 않아도 제도가 안전한 길로 안내하는 기본값 제도)’과, 그 돈을 책임지고 불려줄 ‘거버넌스’(의사결정부터 관리, 실행, 그리고 평가와 피드백까지 이어지는 체계적인 순환 구조)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선택을 강요당해 원리금보장으로 도피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어렵게 고른 상품, 혹은 그렇게 도피해 들어간 예금조차, 사실은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500조 원이라는 거대한 돈이 왜 하필 연 2%대라는 낮은 수익률에 머물 수밖에 없었는지, 그 뒤에 숨은 ‘현행 제도’의 구조적 한계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