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시황이 표시되고 있다. 2026.8.5 © 뉴스1 김진환 기자
미국과 일본의 이례적인 환율 공조가 원화 가치 약세를 방어하려는 우리 외환 당국에도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시장에서는 원·달러 환율의 1300원대 복귀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엔화 약세가 역내 통화 동조화에 따라 원화 약세로 번지는 흐름을 차단할 수 있는 데다, 미국이 아시아 통화 안정에 대한 이해관계를 직접 드러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환율 대응에 든든한 우군을 얻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반도체 중심의 K자형 성장에 고환율이 겹치면서 양극화와 금리 운용 제약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한국은행으로서는 한·미·일 공조 강화로 인해 정책 운용 부담을 상당 부분 덜게 됐다는 분석이다.
15년 만에 엔화 개입, 왜?…美 국채 안정·트럼프 정책 맞물려
미국은 지난달 31일 보유한 유로화를 팔아 엔화를 사는 방식으로 2011년 이후 15년 만에 엔화 개입에 나섰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지난 4일 "엔화 약세가 원화 등 다른 아시아 통화로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며 직접 개입 배경을 밝혔다.
이례적인 개입의 내막에는 미국 국채시장 안정이라는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 일본이 1조 달러 넘게 쌓아둔 미국 국채를 엔화 가치 방어용으로 시장에 내놓으면, 국채 가격 하락과 금리 상승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는 엔화 절하를 방치하기보다 해소하는 편이 자국 시장 안정에 유리한 셈이다. 외환 당국 고위 관계자는 "미국 입장에서는 시장에 충격을 주는 것보다 일본과 함께 개입하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정부의 재산업화 전략과도 맞물린다. 미 재무부 차관보와 미국무역대표부(USTR) 고문을 역임한 브래드 세처 미국외교협회(CFR) 연구원은 4일 보고서에서 아시아 통화 저평가가 글로벌 생산·투자를 미국보다 아시아에 쏠리게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내 제조업 투자를 유치하고 무역수지를 개선해 자국 땅으로 글로벌 자금을 끌어들인다는 트럼프 정부의 목표와 아시아 통화 약세가 정면충돌한다는 취지다.
美 대응 무게가 달라졌다…3국 공조에 외환당국 개입 부담↓
우리 외환당국도 미일 개입과 비슷한 시기에 시장 안정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후 베선트 장관은 엔화가 약세를 보이는 경우 다른 통화들도 뒤따를 수 있다면서 "원화 역시 그간 과도한 변동성을 보여 왔다"고 직접 언급했다.
미국의 행보가 한국의 외환시장 개입을 공식적으로 승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미국이 아시아 통화 약세를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실제 자금까지 동원한 만큼, 당국이 그간 시장 개입에 나설 때 느꼈던 부담감은 훨씬 줄게 됐다.
한미일 3국 공조는 최근 부쩍 강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 고위 관계자는 "올해 1월 베선트 장관의 원화 관련 발언은 사실상 구두 개입 수준이었지만, 이번 대응은 그 무게감이 확연히 다르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3국 공조 수준이 이전보다 크게 높아졌다"고 전했다.
© 뉴스1 양혜림 디자이너
유례없는 수출 호황에 ADR 효과까지…1300원대 환율 기대감 '솔솔'
한국은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라는 자체 원화 강세 재료도 갖췄다. 통화 가치 절상으로 연결될 수 있는 토대가 일본보다도 더 탄탄한 셈이다.
SK하이닉스의 미국주식예탁증서(ADR) 발행도 최근 달러·원 하락을 이끈 핵심 요인으로 손꼽힌다. 최규호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최대 265억 달러의 조달액 중 실제 130억~165억 달러가 환전되면서 환율을 약 45~57원 낮췄다고 추정했다.
여기에 조선사 등 수출기업의 달러 매도와 은행들의 선제적인 현물환 매도, 당국의 시장 안정화 조치, 미국의 레이트 체크가 비슷한 시점 겹치며 환율 하락 폭이 커졌다는 게 공통된 분석이다.
외환당국 내부에서는 한국의 구조적인 펀더멘털이 전반적으로 원화 절상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특히 경상수지 흑자가 과거와 차원이 다른 규모로 확대돼 앞으로 원화 절상 기조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이번 미국의 개입을 계기로 원화가 역내 통화 동조 흐름을 깨고 실제 펀더멘털을 본격 반영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한 외환시장 관계자는 "지금 같은 경상흑자와 수출 흐름이 유지된다면 연말 환율은 1300원대로 복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은 통화정책 운신 폭 확대…양극화 우려도 한숨 돌려
고환율 장기화로 고심했던 한은으로서 3국 공조 강화는 특히 호재다. 한국은 올해 3%대 성장이 예상되는 한편, 회복세가 반도체·수출 대기업에 집중돼 양극화 확대가 우려되고 있다. 반도체·대기업과 내수·비반도체 사이 온도 차가 극명한 탓에 유례없는 수출 호황에도 정작 과실은 고르게 퍼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빗발치고 있다.
고환율은 이러한 격차를 더욱 벌리는 요인이다. 신현송 한은 총재는 지난 4월 후보자 시절 "높은 환율이 지속될 경우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이고, 내수 기업과 서민의 부담을 가중해 경제 양극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수출·대기업은 고환율로 환차익 등의 혜택을 보지만 내수·중소기업과 가계는 성장 온기를 충분히 누리지도 못하는 와중에 수입 원재료 가격과 생활물가 상승 부담을 떠안게 된다.
© 뉴스1 양혜림 디자이너
환율 안정을 위해 금리에 의지해야 한다는 압박도 완화될 전망이다. 3국 공조가 당분간 환율 안정의 보조 축으로 작동할 수 있다면, 한은은 앞으로 금리를 결정할 때 성장·물가·가계대출 등 국내 여건에 더 집중할 여지가 생긴다.
지난달 한은은 기준금리를 2.75%로 인상하면서 3년 반 만에 통화 긴축 국면에 진입했다. 이제 첫 인상이 물가와 성장, 집값, 가계대출 등에 미치는 효과를 면밀히 점검할 때가 됐다. 이때 고환율로 인한 금리 제약이 약해질수록 국내 여건에 맞춰 긴축 속도를 판단할 운신 폭은 넓어지게 된다.
"추세적 원화 강세 여전히 어려워"…되돌림 경계 심리도
시장은 엔화 매수와 잇단 구두 개입 등에 아시아 통화 가치의 바닥이 당분간 높아졌다고 보고 1400원대 초반 수준에서 눈치 보기 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연준의 정책 불확실성과 연내 대미 투자 이행 등 변수가 있지만, 이란 리스크가 해소된다면 환율 1300원대 진입 확률은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관측했다.
다만 정책 공조만으로 원화 강세가 장기간 계속될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원-엔 동조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의 통화·재정정책 조정이나 우리 당국의 실질적인 통화 가치 방어 대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원화 값은 다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ADR 환전과 은행의 환 헤지가 마무리되는 경우 달러 공급이 줄면서 수입 업체의 결제와 내국인 해외투자 수요가 부각될 수 있다.
최규호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과거 일시적인 수급 요인과 정책 개입에 따른 환율 급락이 대체로 1~3주 안에 되돌려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어 "ADR 수급과 정책 공조의 규모가 이례적이지만 효과는 일시적"이라면서 "ADR 소진 후에는 다시 대외 펀더멘털과 연준 금리 전망이 환율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차영후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구조적인 엔화 약세 요인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개입 효과는 단기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최예찬 상상인증권 연구원도 "단기적인 달러·원 향방은 하방 우위가 예상되고 3분기(7~9월) 중 1300원대 진입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으나 일본 같은 급격한 절상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신윤정 SK증권 연구원은 "단기적으로는 원화 강세 가능성을 열어두되, 엔화 강세가 빠르게 진행되는 경우에는 엔 캐리 청산 등에 따른 원화 변동성 확대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icef08@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