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다섯 개 장에 걸쳐 우리는 이미 퇴직연금 제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돈이 어떻게 새고 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김 씨처럼, 애초에 이 게임의 명단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64%라는 숫자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은 계속근로기간 1년 미만이거나 주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근로자를 아예 퇴직급여제도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습니다. 법이 그어놓은 선 밖에 서 있는 이들은 비단 이들뿐만이 아닙니다. 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 그리고 법적 의무 가입 대상임에도 가입하지 않은 영세사업장 근로자까지 더하면 사각지대는 훨씬 넓어집니다. 이 모두를 합친 사각지대의 규모가 전체 취업자의 약 64%에 이른다는 추산도 있지만, 정확한 산출 근거와 세부 구성까지 검증된 숫자는 아닙니다. 다만 어떤 숫자를 기준으로 삼든, 취업자의 상당수가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퇴직급여 자격 자체를 얻지 못하는 구조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계속 이야기해 온 “500조 원이 잠자고 있다”는 진단은, 사실 이미 그 500조 원 안에 이름을 올린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였던 셈입니다.
이것은 퇴직연금의 문제가 아니라, 퇴직급여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다룬 문제들 — 안전 편향, 선택의 감옥, 낮은 수익률, 조각나는 계좌, 마르는 배낭, 그리고 다음 장에서 다룰 수탁자 책임의 부재 — 는 전부 ‘이미 들어온 돈을 어떻게 굴리고, 지키고, 나눠줄 것인가’라는 거버넌스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사각지대는 다릅니다. 이 돈이 DC로 굴러가든 DB로 굴러가든, 계약형이든 기금형이든 상관없이, 애초에 “이 사람에게 퇴직급여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르는 자격의 문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퇴직연금’의 결함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있는 ‘퇴직급여’ 제도 자체의 결함입니다. 그렇다고 노후 소득을 보장하는 국가의 몫인 기초연금의 문제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기초연금은 재원도 대상도 전혀 다른 별도의 안전망입니다. 사각지대에 놓인 근로자가 훗날 기초연금에 더 의존하게 되는 것은 이 문제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논의됐지만, 아직 그대로인 이유
이 사각지대 문제는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닙니다. 노동 현장에서는 오래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고, 사업주가 별도로 신청하지 않아도 근로자가 자동으로 가입되도록 하는 방향의 논의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다만 영세 사업장의 행정 부담과 비용 문제를 둘러싼 이견 속에, 이 논의는 여전히 진행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논쟁의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500조 원을 어떻게 더 잘 굴릴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 500조 원의 명단에 아직 이름을 올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짚고 넘어가야 공평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 문제를 다른 나라는 어떻게 풀었는지는 Part 2에서, 한국형 해법은 Part 3에서 다시 만나겠습니다.
경계 밖으로 밀어낼 것인가, 일단 태울 것인가
제도에는 경계가 필요합니다. 누가 근로자인지, 누가 사업자인지, 얼마나 일해야 퇴직급여를 받을 자격이 생기는지 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일은 법 조문처럼 반듯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주 15시간을 조금 넘나드는 사람, 여러 플랫폼에서 일하는 사람, 작은 가게를 운영하다가 다시 임금근로자가 되는 사람, 공무원이었다가 민간으로 옮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전통적인 “한 회사에 소속된 근로자”라는 틀에 깔끔하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경계 안에 명확히 들어온 사람만 제도에 태우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깔끔하지만, 경계가 애매한 사람을 계속 밖에 남깁니다. 둘째, 일단 들어올 수 있는 그릇을 먼저 열어두고, 부담 방식과 지원 수준을 나중에 조정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퇴직연금이 점점 두 번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후 준비는 “당신은 아직 자격이 애매하니 기다리라”고 미뤄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한 번 그런 선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개인형 퇴직연금, 즉 IRP는 처음에는 퇴직급여를 받은 근로자의 돈을 담는 계좌에 가까웠지만, 이후 자영업자와 공무원, 군인, 교직원처럼 전통적인 민간 근로자 범주 밖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문을 열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신호입니다. 퇴직연금이 반드시 “회사에 소속된 근로자만의 제도”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각지대 해소도 같은 방향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경계 안에 들어왔는지 먼저 따진 뒤 허용하는 제도보다, 일단 자기 이름의 연금 계좌를 가질 수 있게 하는 제도. 국가가 소득과 고용 이력을 파악해 먼저 명단을 만들고, 기본값으로 가입시키되, 부담 능력과 고용 형태에 따라 납입 방식과 지원 수준을 조정하는 제도. 자동가입, 공공개방형 기금, 확장된 IRP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결국 같은 곳에서 만난다
게임에 초대받은 사람이든,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든, 두 문제는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섭니다. 명단에 이름이 오르는 것과, 그 이름 아래 쌓인 돈을 진짜 내 편에서 지키고 불려주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각지대의 해법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제도를 억지로 씌우는 것이 아닙니다. 경계가 애매한 사람도 일단 자기 이름의 연금 계좌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가입의 문턱은 낮추고, 부담과 지원은 소득과 고용 형태에 맞게 조정하는 것. 이것이 “모두를 태우는” 제도의 출발점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마지막 질문 — 내 돈을 맡아주는 사람은 있지만, 정작 나를 위해 싸워주는 사람은 없는 한국 퇴직연금의 거버넌스 공백을 살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