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10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개포주공 1단지 재개발 지역(현재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 내 메타세쿼이아 길 모습 © 뉴스1
서울 강남구 개포동. 양재천 하류의 갯벌에서 이름이 유래한 이곳은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논밭과 야트막한 언덕이 대부분이었다. 1982년 5040가구 규모의 개포주공1단지가 들어서며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5000가구가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40년 가까이 살았다.
그 마을은 다시 한번 바뀌었다. 개포주공1단지는 재건축을 거쳐 2023년 6702가구 규모의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됐다. 40년 만에 엘리베이터도 없던 노후 저층 아파트는 첨단 주거단지가 됐다. 그 과정에서 새로 쌓인 것은 콘크리트와 집값이었고, 사라진 것은 사람들의 옛집과 그 곁에서 오래 자리를 지킨 나무였다.
이성민 감독의 다큐멘터리 '콘크리트 녹색섬'은 그 사라지는 것들을 오랫동안 바라본 영화다. 개포주공1단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감독은 재건축을 앞둔 동네를 찾아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는지 기록했다. 주민들은 아파트 동 번호보다 나무와 길을 기억했다.
사람들이 떠난 뒤에는 나무가 남았다. 건물이 철거되고 주변의 나무도 하나씩 베어지면서 공사장 한가운데 메타세쿼이아를 비롯한 22그루만 섬처럼 남았다. 영화 제목 '콘크리트 녹색섬'은 여기서 나왔다.
벌목이 시작되자 화면은 흑백으로 바뀐다. 뿌리째 뽑히고 가지가 잘린 나무가 중장비에 매달린 채 바닥을 끌려간다. 머리채를 잡혀 어디론가 끌려가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건축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진 옛 주민의 모습인지, 도시에서 밀려나는 자연인지 영화는 답을 붙이지 않는다. 다만 조금 전까지 사람들의 어린 시절과 사계절을 품고 있던 나무가 순식간에 폐목이 되는 장면을 오래 보여준다.
영화는 나무가 쓰러지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카메라는 베어진 나무를 실은 차량을 따라 목재소까지 간다. 일부 목재는 서울숲으로 옮겨져 곤충 호텔과 통나무 벤치가 됐고, 이 감독이 남겨둔 그루터기도 남양주를 거쳐 서울숲 겨울 정원에 자리 잡았다. 감독이 행방을 쫓은 나무 가운데 살아 있는 채 다시 만난 2그루는 남양주의 한 산에서 새 뿌리를 내렸다.
영화 '콘크리트 녹색섬'의 한 장면. 개포주공1단지 내 남은 메타세쿼이아가 눈에 띈다.(영화사 진진 제공) © 뉴스1
한때 수만 그루의 나무가 자랐던 거대한 단지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 새 아파트와 새 조경이 들어섰다. 영화의 중심에는 기후변화보다 고향과 추억, 사라지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2026년 여름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나무는 추억의 배경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중심에는 기후위기보다 '기억'과 '상실'이 있다. 하지만 2026년 여름 이 장면을 보면 다른 의미도 겹친다. 8월 2일 경남 양산의 낮 최고기온은 42.5도까지 올랐다. 40도를 넘는 폭염이 반복되는 도시에서 수십 년 자란 나무는 추억을 품은 풍경인 동시에 햇볕을 막고 도시의 열을 낮추는 기후 인프라다.
뉴스1은 지난 2019년 당시 개포주공1단지 재건축 현장에서 나무가 베어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현장을 찾아 나무 존치·이식 문제를 단독보도했다.
나무를 베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지적이 아니었다. 도시는 바뀌고, 낡은 집은 다시 지어야 사람이 산다. 노상주차장을 지하로 넣으려면 땅을 파야 하고, 도로와 공원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다만 40년 가까이 사람과 함께 자란 나무라면 베기 전에 그대로 둘 수 있는지, 옮길 수 있는지, 설계를 조금 달리할 수 있는지는 한 번쯤 따져보자는 게 일부 주민들의 목소리였다.
현실은 간단하지 않았다. 새 도로가 숲길 일부를 관통했고 공원 예정지와 기존 나무의 위치도 조금씩 어긋났다. 새로 조성될 도로와 공원의 지반 높이도 달랐다. 나무를 그대로 두려면 조경만 손보는 게 아니라 토목과 건축 설계를 함께 바꿔야 했다.
거목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한곳에 뿌리를 뻗은 나무는 이식하기 전 '뿌리돌림'을 해 새 뿌리가 나오게 하고, 큰 뿌리분을 확보해 운반하는 준비가 필요하다. 영화 속 전문가도 준비 없이 공사를 시작한 뒤 큰 나무를 옮기려면 비용이 커지고 생존 가능성도 떨어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환경영향평가에는 약 200그루를 가식장으로 옮겼다가 다시 심는 계획이 있었지만, 전체 수목과 비교하면 일부에 그쳤다.
40도 폭염 '뉴노멀'(New Normal) 시대, 40년 나무는 '조경'만이 아니다
도심의 나무가 더위를 낮추는 원리는 어렵지 않다. 넓게 뻗은 가지와 잎은 햇볕을 가리고, 뿌리로 흡수한 물을 잎에서 내보내는 증산작용은 주변의 열을 빼앗는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소개한 308개 연구의 종합분석에서는 도시숲이 녹지가 없는 도시지역보다 평균 1.6도 낮았다.
그래서 수십 년 된 나무 한 그루를 베고 어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고 해서 기능까지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묘목도 시간이 지나면 커지고 탄소를 흡수하지만, 기존 거목이 이미 만들고 있던 넓은 수관과 그늘을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공교롭게도 이를 숫자로 분석한 국내 연구의 대상지가 바로 개포주공1단지였다.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연구진은 2019년 '재건축 아파트 단지의 탄소 흡수량 변화를 고려한 조경 식재 시나리오 분석'에서 개포주공1단지 공원 예정지의 17종 177그루를 조사했다. 당시 이들 나무의 탄소 흡수량은 연간 최대 1만 970㎏으로 추산됐다.
연구진은 기존 나무를 얼마나 옮겨 심고 새 나무를 얼마나 심을지 4가지 시나리오를 비교했다. 이 가운데 기존 수목 50%를 이식하고 50%를 새로 심는 방안을 선택했는데, 이 경우 탄소 흡수량이 기존 수준을 회복하는 데 40년이 걸리는 것으로 계산됐다. 이후 최대 흡수량은 연간 1만 3542㎏까지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심 속 나무 '온실가스 흡수원'…日에선 재건축 때 거목 1.4만 그루 보존·이식
토지이용·토지이용변화·임업(LULUCF)에서도 도심 속 나무는 중요하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국가 온실가스 인벤토리 지침은 도시와 주거지를 '정주지'(Settlements)라는 토지이용 범주로 분류하고, 이곳에서 나무 등 바이오매스가 자라거나 사라지면서 생기는 탄소저장량 변화를 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아파트 나무 한 그루를 베는 양이 한국의 국가 인벤토리에 그대로 따로 찍힌다는 뜻은 아니지만, 도시의 목본식물 역시 탄소를 저장하는 생물량이라는 점은 국제적인 온실가스 산정 체계에도 반영돼 있다.
오래된 나무라고 매년 어린나무보다 반드시 더 많은 탄소를 흡수하는 것도 아니다. 어린나무는 빠르게 자라는 시기에 높은 성장률을 보일 수 있다. 거목의 가치는 이미 몸속에 쌓인 탄소와 지금 당장 제공하는 넓은 수관과 그늘, 새와 곤충이 깃드는 공간을 한꺼번에 잃는다는 데 있다.
기후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도시라면 이 시간의 공백도 비용으로 봐야 한다.
이성민 감독이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콘크리트 녹색섬' 언론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26.8.11 © 뉴스1 황덕현 기후환경전문기자
국내에서도 기존 나무를 재건축 계획에 먼저 반영하는 사례가 생겼다. 서울시는 2022년 대치 미도아파트 신속통합기획안을 확정하면서 단지 내 울창한 기존 수목을 최대한 보전하도록 했다. 건축한계선을 충분히 확보해 오래된 나무를 새 단지 안에 남기는 방식이다.
일본 도시재생기구(UR)는 1994년부터 아예 이를 '그린뱅크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다. 오래된 주거단지를 다시 지을 때 지역의 경관과 역사에 가치가 있는 나무는 가능한 한 현 위치에 보존하고, 남길 수 없는 나무는 옮겨 심는다. 그것도 어렵다면 잘라낸 나무를 벤치와 나무 이름표, 목재 칩 등으로 다시 쓴다. 지금까지 보존하거나 이식해 활용한 큰 나무는 약 1만 4500그루다.
싱가포르도 수목보전구역에서는 둘레가 1m를 넘는 나무를 베려면 개발공사가 진행 중인 경우에도 정부 당국의 서면 승인을 받도록 한다.
일본이나 싱가포르의 방식을 한국의 민간 아파트 재건축과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해외 사례는 나무를 공사가 끝난 뒤 채워 넣는 조경물이 아니라 개발계획 단계에서 확인해야 할 기존 자산임을 상기케 한다.
'콘크리트 녹색섬'은 재건축을 하지 말자는 영화도, 모든 나무를 살리자는 영화도 아니다. 이 감독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거창한 환경 담론을 말하기보다 관객이 영화를 본 뒤 집 앞의 나무 한 그루라도 다시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면 개발 초기부터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옮기며, 베어진 나무를 어떻게 다시 쓸지 따져볼 여지가 생긴다.
이재명 정부의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등을 포함해 도시는 계속 새로 지어질 것이다. 지하주차장도 만들고 새 공원도 조성해야 한다. 다만 새 아파트에 어떤 나무를 심을지 정하기 전에, 이미 그 땅에서 40년을 살아온 나무가 어디 있는지부터 설계도에 그려 넣을 수는 없을까.
황덕현 경제부 기후환경전문기자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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