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였는데 부당이득 14조?"…정유 담합 첫 재판서 공방 예고

경제

뉴스1,

2026년 8월 20일, 오전 10:45

한 시민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있다./뉴스1 이호윤 기자

HD현대오일뱅크·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 등 정유 4사의 유가 담합 사건 공판에서 담합 성립 여부와 함께 규모, 산정 근거 등이 주요 쟁점으로 다뤄질 전망이다. 또 정유사와 주유소 간 전량구매계약 관행이 담합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를 두고도 공방이 오갈 것으로 예상된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HD현대오일뱅크·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 등 정유 4사의 유가 담합 사건 첫 공판이 이날 개최된다. 정유업계는 검찰이 기소 과정에서 제시한 '14조 원대 담합 규모'와 '26조 원대 경쟁제한 효과'라는 수치를 두고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적자였는데 부당이득 14조?…산정 방식에 우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는 지난달 HD현대오일뱅크,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등 정유 4사를 재판에 넘기면서 담합 기간인 2024년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관련 매출액을 기준으로 직접적인 담합 규모가 14조 2000억 원에 이른다고 판단했다. 경쟁제한 효과는 26조 원대로 산정했다.

정유업계는 이 같은 수치가 담합이 없었을 경우를 가정해 산출한 이론적 추정치일 뿐 정유사들이 실제로 얻은 이익이나 부당이득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해당 기간 정유사들은 정제마진 악화 등으로 대규모 영업적자를 기록한 시기도 있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앞서 정유 4사는 지난 2024년 3분기 합산 약 1조 6500억 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업계 관계자는 "적자를 감내하던 기업들이 같은 기간 14조 원의 부당이득을 챙겼다는 식의 설명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업계는 이론적으로 산출된 경쟁제한 효과가 실제 부당이득처럼 받아들여질 경우 정유사들이 국민을 상대로 폭리를 취했다는 잘못된 인식이 확산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사실관계를 판단해야 하는 공소장에는 담합 부당이득 14조 원과 경쟁제한 효과 26조 원이 범죄사실로 기재돼 있지 않고 해당 숫자에 대한 설명도 없다"며 "공소장에 들어 있지 않은 숫자로 정유업계가 호도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량구매, MB 정부 때 이미 제도 개선한 사안"
업계는 정유사와 주유소 간 전량구매계약 관행이 담합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목된 것에 대해서도 반발하고 있다.

전량구매계약은 주유소가 특정 정유사의 제품을 전량 구매하도록 하는 거래 방식이다. 업계에서는 이 문제가 이명박 정부 당시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불공정거래행위 여부와 관련해 조사·제재된 뒤 제도적으로 정비된 사안이라고 주장한다.

앞서 공정거래위원회는 2009년 정유사들이 주유소에 전량구매계약을 강제한 관행을 조사해 제재한 바 있다. 이후 정부는 주유소가 복수 정유사의 브랜드를 취급하거나 특정 브랜드 간판 없이 여러 회사의 제품을 판매하는 자가상표 주유소로 전환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와 유가정보 공개 시스템인 오피넷을 정비했다.

업계는 당시 정부 판단에 따라 표준계약서가 마련되고 거래 관행도 개선됐다고 본다. 10여 년이 지난 뒤 같은 관행을 이번에는 담합의 수단으로 문제 삼는 것은 정책의 일관성 측면에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구조상 짬짜미 어렵다"…과거 담합 제재 취소 전례도
정유업계는 검찰의 담합 혐의에 대해 법정에서 성실히 소명하겠다는 입장이다. 특히 경쟁사끼리 가격을 임의로 정하는 것이 어려운 시장 구조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국내 주유소 공급가는 국제 시장 기준인 싱가포르 현물 가격(MOPS)에 연동돼 국제유가 변동이 반영되는 만큼 정유 4사의 가격 등락 추세가 비슷하게 움직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주장이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을 통해 정유사별 공급가격이 매주 공개되고 있어 담합이 현실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앞서 2011년 이명박 정부 당시에는 정유사들의 주유소 원적지 관리 등을 둘러싸고 대대적인 담합 조사와 과징금 부과가 이뤄졌지만 이후 장기간의 소송을 거치며 관련 제재가 잇달아 취소된 전례가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이 오만 무산담 해상에 늘어서 있다. © 로이터=뉴스1

호르무즈 대응·최고가격제 협조에도…"공로 사라지고 낙인만"
정유업계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정부 정책에 협조해 온 노력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담합 의혹만 부각되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통항 불안 등으로 원유 도입 리스크가 커진 기간에 국내 정유사들은 정부와 협력해 원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국내 공급망을 유지하는 데 힘을 보탰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휘발유·경유 등을 국제 시황 가격으로 수출하지 않고 국내 수급 안정을 위해 상당 물량을 내수로 돌려 최고가격제에 맞춰 비싼 정제 원료가 대비 낮은 판매가격으로 손해를 감수해 온 게 정유사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부분은 평가받지 못하고 오히려 내수 판매 과정 자체가 담합의 근거로 지목되니 기업 입장에서는 자포자기 심정까지 든다"고 덧붙였다.

앞서 정유사들은 지난 3월 도입된 석유류 최고가격제 시행 과정에서 정부의 물가 안정 정책에 맞춰 공급가격 상한을 준수해 왔다. 이에 따른 손실을 사후 보전하기 위한 정산 기준을 두고도 정부와 업계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국제 시세와 원가를 반영해야 하지만 판매가격은 제한되고 손실 정산마저 지연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더해 정유사들이 담합으로 폭리를 취했다는 혐의까지 제기되면서 업계의 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최고가격제에 따른 손실의 사후 보전을 위한 정산 기준을 둘러싼 이견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담합 수사와 재판이 본격화하면서 정산금 지급 시기나 규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며 "정산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담합 프레임까지 씌워지면 협상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업계는 이번 재판이 담합 혐의의 사실관계뿐 아니라 조사와 기소 과정의 시점, 담합 규모·경쟁제한 효과 산정 방식의 타당성을 놓고 치열한 공방이 전개될 것으로 본다.

업계 관계자들은 "확정되지 않은 추정치가 실제 부당이득처럼 받아들여지거나 정부 정책에 협조하며 손실을 감수해 온 정유사들의 노력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채 부정적인 낙인만 남아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ji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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