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 제도의 약속: "황금 수갑의 진실"[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10

경제

이데일리,

2026년 8월 29일, 오전 08:06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DC형(확정기여형)으로 바꾸라고요? 싫습니다. 그냥 회사에서 알아서 해주는 DB형(확정급여형)에 있을래요.”

퇴직연금 컨설팅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입니다. 한국 직장인들은 본능적으로 DB형을 선호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내가 굴리면 손해 볼 것 같고, DB형은 최소한 회사가 내 월급 오르는 만큼은 챙겨주니까”입니다. 이 판단에는 분명 현실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서글픈 아이러니도 함께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DB형을 선호하는 이유는 DB형 자체의 장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DC형과 IRP(개인형 퇴직연금) 같은 다른 대안에 대한 확신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가 믿고 있는 한국형 DB 제도는 선진국이 말하는 그 ‘DB’가 맞을까요?

1950년대 미국, 인재를 묶어두는 ‘황금 수갑’

시계를 1950년대 미국 제조업의 황금기로 돌려봅시다. 거대 자동차 기업들은 쏟아지는 주문을 감당하기 위해 숙련된 기술자가 절실했습니다. 하지만 기술자들은 임금을 조금만 더 줘도 경쟁사로 이직해 버렸습니다. 기업주들은 이들을 붙잡기 위해 ‘황금 수갑(Golden Handcuffs)’이라는 장치를 강력하게 활용합니다. 바로 현대적인 DB(확정급여형) 연금입니다.

“지금 당장의 월급은 조금 적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회사에서 30년을 일하고 은퇴하면, 죽을 때까지 현역 시절 월급의 60~70%를 매달 주겠다.” 이것은 노동자에게는 축복이었지만, 기업에게는 막대한 재무적 위험을 떠안는 도전이었습니다. 직원이 얼마나 오래 살지, 물가가 얼마나 오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평생 소득’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지키려면 ‘치열하게’ 굴려야 한다

여기서 서구형 DB의 핵심 메커니즘이 작동합니다. 기업이 근로자의 ‘평생’을 책임지겠다고 공언했다면, 그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산을 불려야 합니다. 서구 기업들이 DB 적립금을 주식·채권·대체투자에 넣어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것은 공격적인 성향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불리지 않으면 미래의 연금 지급 약속을 지킬 수 없어 회사가 파산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구형 DB는 처음부터 ‘적극적인 자산운용’을 전제로 설계된 제도입니다.

한국의 현실 — ‘연금’이 아닌 ‘퇴직금 지급 보증’

반면 한국의 DB는 태생부터 다릅니다. 우리 법에서 정한 DB형의 지급 의무는 평생 급여가 아닌 “퇴직 직전 3개월 평균 임금 × 근속월수”에 해당하는 목돈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공식 아닌가요? 바로 과거 ‘퇴직금’ 공식을 그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한국 기업은 근로자가 은퇴 후 얼마나 오래 살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회사의 의무는 ‘퇴직하는 날, 법정 퇴직금 액수만큼의 목돈’을 쥐여주는 것으로 깔끔하게 끝납니다. 엄밀히 말해 한국의 DB 제도는 전통적 의미의 확정급여형 연금제도라기보다, 회사가 망해도 퇴직금을 떼이지 않도록 금융기관에 맡겨둔 ‘퇴직금 지급 보증제도’에 가깝습니다.

‘안전’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두 개의 저울

여기서 조금 더 정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DB를 무조건 나쁜 제도라고 단정하기 전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저울을 놓고 봐야 합니다.

근로자 개인의 눈으로 보면, 이 제도는 뜻밖에 후한 편입니다. “퇴직 직전 3개월 평균임금 × 근속연수” 공식은, 승진과 호봉 상승분까지 감안하면 연 7%에 가까운 임금 상승률로 복리 계산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냅니다. 이것은 지금 한국 퇴직연금의 실제 평균 수익률(연 2% 수준)보다 훨씬 높습니다. 회사만 약속을 지킨다면, 20~30년을 한 회사에서 일한 사람에게 DB는 결코 손해 보는 선택이 아닙니다.

반면 회사의 눈으로 보면, 이 제도는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은퇴하는 고참 직원의 자리를 저임금 신입이 채우는 인력 구조 때문에, 사업장 전체의 임금 총액은 개인의 임금 상승률만큼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낮은 3%대 초반 정도로만 불어납니다. 회사가 실제로 감당해야 할 목표수익률은 가입자 개인이 체감하는 7%대 약속보다 훨씬 낮게 보입니다. DB 적립금을 공격적으로 굴리지 않는다고 해서, 회사가 반드시 태만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두 저울은 정확히 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근로자에게는 후한 약속이, 회사에게는 헐거운 목표가 되는 이 간극 — 이것은 한국 DB 제도의 강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함정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첫째, 이 후한 약속은 회사가 실제로 지킬 수 있을 때만 유효합니다. 최소 적립 비율을 채우지 못한 채 ‘외상’으로 남겨두는 기업에게는 이 계산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 회사가 무너지는 순간, 아무리 후한 공식도 휴지 조각이 됩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스터드베이커 사건이 정확히 이 지점을 겨냥합니다.

둘째, 이 후한 약속은 ‘한 회사에서 20~30년을 버틴 사람’에게만 열려 있습니다. 평생직장 신화가 무너지고 여러 번 이직하는 것이 당연해진 지금(Part 1 제4장), 이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국의 DB는 나쁜 제도라기보다, 사라져가는 소수에게만 열린 특권에 가까워지고 있는 셈입니다.

좋은 제도일수록 더 잘 굴려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더 남습니다. DB가 근로자에게도, 회사에게도 조건만 맞으면 좋은 제도라면, 그 적립금은 어떻게 굴려야 할까요?

회사 입장에서 필요한 수익률이 3%대 초반으로 보인다고 해서, 운용 목표를 그 수준에만 맞춰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안정적인 분산투자와 장기투자를 통해 그보다 높은 수익을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면, 그 초과수익은 회사의 재정 안정성을 높입니다. 적립 부족 위험을 줄이고, 경기 침체나 임금 구조 변화가 왔을 때도 약속을 지킬 여력을 만들어 줍니다. 근로자에게는 약속 이행 가능성이 높아지고, 회사에게는 미래 부담이 줄어듭니다.

이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여러 회사의 적립금을 하나로 뭉치는 ‘풀링(집합투자, Pooling) 효과’입니다. 개별 기업이 혼자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분산투자 상품에 더 싼 비용으로 접근하고, 규모를 바탕으로 더 나은 수수료와 운용 조건을 협상할 수 있습니다. 서구식의 과도한 위험 추구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표는 무리한 고수익이 아니라, 예금보다 넓은 선택지 안에서 더 안정적이고 더 나은 장기수익을 얻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금만 고집하며 낮은 수익률에 안주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보수적인 선택이라고만 보기 어렵습니다. 회사의 자금을 맡아 굴리는 담당자에게는 암묵적인 셈법이 있습니다 — “손실이 나서 문책당하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낫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낮은 수익률이 오히려 담당자 자신을 지켜주는 안전판이 됩니다. 하지만 정작 지켜야 할 대상, 즉 회사의 재무 건전성과 근로자의 노후는 그만큼 손해를 봅니다. 법적 의미의 배임을 단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충분히 더 나은 운용 가능성이 있는데도 아무 검토 없이 방치한다면, 그것은 자금을 맡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수탁자 책임의 정신과도 분명히 어긋납니다.

국가적 기회비용, 그리고 남아 있는 질문

이 문제는 개별 회사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수백조 원에 달하는 국민의 노후 자금이 물가 상승도 못 따라잡는 예금에 잠자고 있다면, 그것은 국가 전체의 기회비용입니다. 반대로 DB 적립금이 제대로 된 거버넌스 아래 장기 자금으로 운용된다면, 그 돈은 자본 시장으로 흘러가 산업을 키우고, 그 성장의 과실은 다시 기업의 재정 안정성과 국민의 노후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DB 적립금 운용은 회사의 부담을 줄이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국가경제의 장기 자본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앞서 짚은 첫 번째 함정 — “회사가 정말 이 후한 약속을 지킬 수 있는가” — 라는 질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영원한 기업은 없었습니다. 회사가 무너지는 순간, 장부상의 지급 보증은 휴지 조각이 됩니다.

미국에서도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나며 전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미국의 한 자동차 회사의 파산이 불러온 충격과, 그로 인해 탄생한 ‘수탁자 책임’이라는 연금의 헌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연금이 기업의 금고가 아닌 독립된 성역이 되어야 했던 역사를 추적합니다.

DB 제도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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