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빈자리?…‘마이더스의 손’이 찍은 스타트업, 국가대표 AI 판 흔든다

IT/과학

이데일리,

2026년 1월 29일, 오후 06:59

[이데일리 김현아 기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진 중인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독파모)’ 사업이 추가 공모를 통해 2막에 들어섰다.

1차 평가를 통과한 LG AI연구원, SK텔레콤, 업스테이지 등 3개 컨소시엄에 더해 한 자리를 추가로 선발하는 구조다. 그러나 이번 추가 공모를 앞두고 네이버클라우드, 카카오, KT 등 주요 대기업들이 불참 의사를 밝히면서 “국가대표 AI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업계 안팎에서는 이런 시각이 독파모 사업의 성격 변화를 간과한 것이라는 반론이 나온다. 이번 추가 공모는 단순한 ‘보강전’이 아니라, 국가대표 AI의 무게중심을 제조 능력에서 설계 능력으로 옮기는 전환점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임정환(왼쪽) 모티프테크놀로지스 대표, 신재민 트릴리온랩스 대표(사진=각사 제공)
1차는 ‘기초 체력’, 2차는 ‘설계 경쟁’

지난 1차 평가는 대규모 데이터를 활용해 모델을 바닥부터 학습시키는 ‘프롬 스크래치(From Scratch)’ 역량, 즉 기초 체력을 검증하는 단계였다. 국내 기업들이 외산 모델에 의존하지 않고도 초거대 모델을 학습시킬 수 있는지 확인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반면 2차 평가와 추가 공모는 이 기초 체력을 전제로, 얼마나 독자적인 지능 구조와 아키텍처를 설계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종합 경쟁력을 가리는 무대가 돼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제조’만으로는 부족하다…AI 주권의 조건

글로벌 AI 경쟁 환경을 감안하면 이러한 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 미국 빅테크들은 최신 모델을 비공개로 유지한 채 구형 모델만 제한적으로 공개하고 있고, 오픈소스 생태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 구조를 가져와 학습만 반복하는 방식에 머문다면, 라이선스 정책 변화나 기술 블록화 국면에서 한국 AI는 언제든 종속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결국 AI 주권의 핵심은 모델을 ‘학습시키는 능력’을 넘어, 지능의 구조 자체를 직접 설계할 수 있는 힘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추가 공모에 스타트업들이 전면에 나선 것은 오히려 과감한 설계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글로벌 AI 혁신의 주역인 오픈AI, 앤트로픽, 딥시크가 모두 스타트업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빠른 의사결정과 반복 실험, 파격적인 구조 설계를 감당할 수 있는 ‘기술 야성’은 여전히 스타트업의 가장 큰 강점으로 꼽힌다.

2024년 11월 4일 저녁 서울시 서초구 소재 모레 사무실에서 진행된 모레와 텐스토렌트의 업무 협약식. (사진 왼쪽부터 모레 조강원 대표, 텐스토렌트 CEO 짐 켈러) 사진=모레
모티프, 인프라와 설계를 함께 보는 접근

실제 이번 추가 공모에는 기술 밀도가 높은 스타트업들이 전면에 부상했다. 모레의 자회사인 모티프테크놀로지스는 기존 트랜스포머 구조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그룹별 차등 어텐션(GDA)’이라는 독자적 어텐션 구조를 적용한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모레는 AMD의 전설이자 반도체 설계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짐 켈러가 이끄는 텐스토렌트와 협력해온 기업으로, AI 인프라와 모델 설계를 동시에 다루는 기술 철학이 강점으로 꼽힌다. 임정환 모티프 대표 역시 모레 출신으로, 고성능 거대언어모델(LLM)과 멀티모달 기술 전반에 대한 경험을 갖추고 있다.

구현모 KAIST 시스템공학과 겸임교수(전 KT 대표)
트릴리온랩스, 차세대 아키텍처에 도전하다

또 다른 주인공은 트릴리온랩스다. 이 회사는 외부 의존 없이 프롬 스크래치 학습을 완수하고, 확산 기반 트랜스포머라는 차세대 아키텍처를 독자 구현하며 설계 내공을 보여줬다.

트릴리온랩스는 네이버 출신의 신재민 대표가 창업한 회사로, 국내 최초로 확산 기반 트랜스포머 아키텍처를 적용한 대규모 언어 모델 ‘Trida-7B’ 개발에 성공했다.

AI·딥테크 투자에서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는 구현모 KAIST 시스템공학과 겸임교수(전 KT 대표)는 트릴리온랩스에 대해 “개발 속도와 설계 에너지가 다르다”며 “머지않아 글로벌 최상위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루닛, 수아랩, 리벨리온 등 굵직한 AI·반도체 스타트업 투자로 성과를 거둔 그의 시선은 규모보다 설계와 속도에 맞춰져 있다.

‘패자부활전’이 아닌 설계 경쟁의 장

이들 스타트업의 공통점은 몸집이 아니라 설계에 대한 집요함이다. 정부가 GPU와 데이터라는 기반을 동일하게 제공한다면, 남은 변수는 누가 더 창의적인 구조를 설계하고 이를 얼마나 빠르게 구현하느냐다. 추가 공모가 단순한 패자부활전이 아니라, 진짜 실력을 가리는 설계 경쟁의 장이 돼야 한다는 이유다.

제조를 넘어 설계로 향하는 국가대표 AI 사업의 2막. 대기업의 안정감 위에 스타트업의 기술 야성이 더해질 때, 한국형 AI는 비로소 글로벌 경쟁을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기업의 빈자리를 걱정하는 시선이 아니라, 그 빈자리가 어떤 가능성을 열 수 있는지를 읽어내는 판단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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