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인공지능(AI) 환자모니터링 시장에서 병원을 선점하기 위한 가격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 경쟁사보다 10~20%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기존 공급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조건으로 입찰에 참여하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출혈 경쟁이 이제 막 형성되는 AI 환자모니터링 산업의 가치사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시장 초기에는 개발사가 기술을 중심으로 주도권을 갖지만, 병원 영업과 고객 관리가 판매사 중심으로 고착될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부가가치와 협상력이 판매 채널을 보유한 제약사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그래픽=챗GPT)
◇“다 같이 죽자는 경쟁”…마진 포기한 ‘반값 입찰’
29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AI 환자모니터링 시장에서 병원 입찰을 따내기 위한 가격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단순히 경쟁사보다 가격을 낮추는 수준을 넘어 사실상 마진을 포기하면서까지 병원을 선점하려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판매사들이 병원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사보다 10~20%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례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일부 입찰에서는 가격 인하 폭이 기존 공급가의 절반을 훌쩍 밑도는 수준까지 확대됐다. 구독형 사업모델에서도 사실상 수익성을 포기한 조건이 제시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또 다른 AI 모니터링 개발사 관계자는 “병원이 수익의 98%를 가져가고 업체는 2%만 가져가는 구조까지 등장했다”며 “운영할수록 적자가 나는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A대학병원에 이어 B대학병원에서도 비슷한 방식의 가격 제안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지금은 다 같이 죽자는 식의 출혈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AI 환자모니터링은 웨어러블 기기로 심전도와 호흡, 산소포화도 등 생체신호를 실시간 측정하고 AI가 이상 징후를 분석해 의료진에게 알려주는 서비스다. 현재 국내 시장에서는 씨어스(458870)가 대웅제약(069620)과, 메쥬(0088M0)가 동아에스티(170900)(동아ST)와 병원 영업을 협력하고 있으며, 에이티센스는 메디아나(041920)와 협력해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시장 선도 업체가 병원 현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으면서 후발 업체들의 가격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관련 업계 관계자는 “선도 업체의 경우 여러 생체신호 모니터링 솔루션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통합해 제공하면서 경쟁력을 확보한 상태”라며 “후발주자 입장에서는 기술만으로 차별화하기 쉽지 않다 보니 가격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측면도 있다”고 짚었다.
AI 환자모니터링 시장의 출혈 경쟁과 같은 사례가 국내 의료산업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보툴리눔 톡신 시장에서도 병·의원 거래처 확보를 위한 가격 경쟁이 장기간 이어졌고, 최근에는 스킨부스터 시장에서도 제조사와 판매사가 병·의원 점유율 확대를 위해 공격적인 가격 정책을 펼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다만 AI 환자모니터링 시장은 가격 경쟁의 부담이 판매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개발사까지 이어질 수 있어 산업 전반에 미치는 파장이 더 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시장 선점 위한 아귀다툼…왜 제약사는 마진을 포기하나
일각에서는 현재의 가격 경쟁이 시장 초기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인 만큼 장기간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병원 레퍼런스가 축적되고 제품 경쟁력이 검증되면 가격보다 서비스 품질과 운영 역량이 중요한 경쟁 요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초기 시장의 특성상 락인 효과가 크지 않은 것도 가격 경쟁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았다. 아직 특정 제품에 대한 임상적 신뢰와 병원 내 사용 경험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에 병원도 언제든 더 나은 조건이나 성능을 제시하는 경쟁사 제품으로 교체할 수 있어서다. 먼저 병원을 확보했다고 해서 고객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크지 않은 만큼 판매사들이 초기 입찰에서부터 공격적인 가격 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국 병원 영업망과 입찰 경험을 갖춘 제약사들이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도 경쟁을 키운 배경으로 꼽힌다. 제약사의 경우 기존 전문의약품 사업에서 확보한 안정적인 현금창출력을 바탕으로 단기 수익성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병원을 먼저 확보하는 전략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약사 입장에서 AI 환자모니터링 사업은 당장의 수익원이라기보다 미래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을 위한 교두보 성격이 강하다. AI 환자모니터링은 의사뿐 아니라 병원장, 간호부, 의료정보실, 디지털혁신센터, IT부서 등 병원 내 다양한 조직이 도입 여부를 함께 결정하는 만큼 기존 의약품 영업만으로는 접점이 제한적이었던 의사결정 조직과 관계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글로벌 빅파마들도 의약품 공급을 넘어 병원의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는 '디지털 파트너' 전략을 강화하는 추세다. 업계에서는 병원과의 접점 확보를 발판으로 원격환자관리(RPM), 디지털 치료기기(DTx), 의료 AI 등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는 점도 제약사들이 공격적인 영업에 나서는 배경이라고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아직 시장 초입 단계인 만큼 판매사들이 시장 선점을 위해 공격적으로 영업하고 있지만, 시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지금과 같은 기조가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술보다 채널…바이오텍의 딜레마 재현?
다만 출혈 경쟁이 끝난다고 해서 개발사들의 고민도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시장 선점 과정에서 형성되는 판매 구조가 장기적으로 AI 환자모니터링 개발사에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AI 환자모니터링 시장은 개발사가 기술을 제공하고 제약사와 의료기기 기업 등이 병원 영업과 입찰을 담당하는 구조다. 시장이 커질수록 병원 계약과 고객 관계, 판매 데이터를 판매사가 축적하게 되면 시장 접근권도 자연스럽게 판매사 중심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AI 개발사 입장에서는 자체 영업망이 제한적인 만큼 병원 판매를 계속 판매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병원 고객이 특정 판매사를 중심으로 관리되는 구조가 자리 잡으면 판매사를 교체하거나 독자 영업으로 전환하는 것도 점차 어려워질 수 있다.
이 같은 구조는 국내 바이오텍이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한 뒤 해외 상업화를 글로벌 제약사에 맡기면서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모습과도 일부 닮아 있다. 계약 구조는 다르지만 기술을 가진 기업보다 최종 고객과 판매 채널을 확보한 기업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
출혈 경쟁으로 인한 가격이 시장의 새 기준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보툴리눔 톡신과 스킨부스터 시장에서도 병원 선점을 위한 가격 경쟁은 시간이 지나며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고 업계의 영업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낮아진 공급가격은 이후 병·의원의 가격 기준으로 굳어졌고, 후발 업체들도 이에 맞춰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물론 현재 대부분의 AI 환자모니터링 서비스 개발사와 판매사 간 계약은 다년 단위로 맺어져 있어 당장의 가격 경쟁이 개발사의 공급대가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지금의 낮은 병원 공급가격이 시장 가격으로 굳어진다면 계약 갱신 과정에서 판매사가 가격 인하 부담을 개발사에 전가할 가능성도 있다. 병원 영업을 담당하는 제약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AI 개발사의 협상력은 약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개발사들이 가격 경쟁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병원이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제품과 서비스를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AI 환자모니터링 기업 관계자는 “지금 시장은 사실상 치킨게임 양상”이라며 “단순히 가격을 낮추기보다 병원 업무 흐름에 맞춘 통합 솔루션과 지속적인 서비스 고도화를 통해 경쟁사와 차별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