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약한 수소결합으로 ‘결합 1등’ 구리 밀어냈다

IT/과학

이데일리,

2026년 9월 06일, 오전 12:02

[이데일리 이소현 기자] 늘 ‘결합 1등’으로 여겨졌던 구리가 밀려났다. KAIST 연구진이 금속과 직접 결합하는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주변의 약한 수소결합만 조절해 구리가 가장 안정적으로 결합한다는 오랜 금속 안정성 순서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서창현(왼쪽부터)  석박사통합과정, 니투 싱(Neetu Singh) 박사, 백윤정 교수, 임하늘 석박사통합과정(사진=KAIST)
서창현(왼쪽부터) 석박사통합과정, 니투 싱(Neetu Singh) 박사, 백윤정 교수, 임하늘 석박사통합과정(사진=KAIST)
KAIST는 화학과 백윤정 교수 연구팀이 비타민 B2의 핵심 구조인 플라빈을 이용해 금속 착물을 개발하고, 금속 주변의 수소결합을 조절해 기존 ‘어빙-윌리엄스 계열’과 반대되는 금속 안정성 경향을 구현했다고 6일 밝혔다.

어빙-윌리엄스 계열은 망간(Mn), 철(Fe), 코발트(Co), 니켈(Ni), 구리(Cu), 아연(Zn) 등 전이금속이 주변 분자와 얼마나 안정적으로 결합하는지를 나타낸 경험 법칙이다. 일반적으로 망간에서 구리로 갈수록 안정성이 높아지고, 특히 구리가 매우 안정한 결합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차이는 금속 안에서 전자들이 어떻게 배치돼 있는지를 뜻하는 전자 구조에 따라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돼 왔다. 어떤 금속이 더 잘 붙는지는 각 금속이 가진 고유한 특성에 크게 좌우된다고 본 것이다.

지금까지 이 순서를 바꾸려면 금속을 직접 붙잡는 분자인 리간드를 새롭게 만들거나, 금속과 주변 분자가 결합하는 방식인 배위 구조를 바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금속 주변의 수소결합이 구리의 구조 변형을 제한해 안정성을 선택적으로 낮추는 그림(사진=KAIST)
금속 주변의 수소결합이 구리의 구조 변형을 제한해 안정성을 선택적으로 낮추는 그림(사진=KAIST)
◇직접 결합 대신 주변 수소결합에 주목

연구팀은 금속과 직접 결합하는 부분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작용하는 수소결합에 주목했다. 수소결합은 분자와 분자 사이에서 작용하는 비교적 약한 힘으로, 주변 구조를 일정한 형태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연구팀은 플라빈의 일부 화학 구조를 변형한 ‘플라빈 유도체’를 이용했다. 망간부터 아연까지 서로 다른 금속을 넣되, 각 금속을 둘러싼 분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결합하도록 만들었다. 금속 주변의 기본 조건을 같게 한 뒤 수소결합이 각 금속의 안정성에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수소결합이 특히 구리가 안정해지는 데 필요한 구조 변화를 막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구리는 주변 결합 구조를 조금 변형해 자신에게 유리한 형태를 만들면서 더 안정해지는 특성이 있다. 사람이 몸을 움직여 가장 편한 자세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연구팀이 만든 구조에서는 주변의 수소결합이 구리를 단단히 잡아주면서 이런 ‘편한 자세’를 취하기 어려워졌다. 그 결과 구리가 안정화 과정에서 얻던 이점이 줄어들었고, 기존과 반대되는 ‘반(反) 어빙-윌리엄스 경향’이 나타났다.

금속 주변의 수소결합이 구리의 안정성을 선택적으로 낮춰 기존 Irving-Williams series를 뒤집음을 보여주는 그림(사진=KAIST)
금속 주변의 수소결합이 구리의 안정성을 선택적으로 낮춰 기존 Irving-Williams series를 뒤집음을 보여주는 그림(사진=KAIST)
이번 연구의 의미는 구리가 결합 1등에서 밀려났다는 사실 자체보다, 금속마다 정해져 있다고 여겨졌던 결합 안정성의 순서를 주변 환경을 바꿔 조절할 수 있음을 보였다는 데 있다.

예컨대 여러 금속이 섞여 있을 때 원하는 금속은 잘 붙게 하고 다른 금속은 덜 붙게 만들 수 있다면, 필요한 금속만 골라내거나 회수하는 기술에 활용할 수 있다. 원하는 금속이 더 잘 작용하도록 주변 환경을 조절하는 촉매 설계에도 적용 가능성이 있다.

또 우리 몸의 단백질과 효소가 철, 구리, 아연 등 여러 금속 가운데 필요한 금속을 골라 사용하는 것처럼, 생명체의 작동 원리를 본뜬 생체모사 시스템 설계에도 새로운 방법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백윤정 교수는 “이번 연구의 핵심은 구리의 안정성을 낮췄다는 것 자체보다, 금속이 가진 고유한 특성으로 여겨졌던 결합 안정성의 순서를 주변 환경을 통해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데 있다”며 “앞으로 원하는 금속을 선택적으로 붙잡거나 반응시키는 새로운 화학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 활용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덴마크에서 열린 국제배위화학학술대회(ICCC)에서도 주목받았다. 제1 저자인 KAIST 화학과 임하늘 석박사통합과정 학생은 이번 연구를 포스터로 발표해 한국인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우수 포스터상을 받았다.

임하늘 학생이 제1 저자로 참여한 이번 연구는 미국화학회가 발행하는 국제 학술지 ‘미국화학회지(JACS)’에 지난 3일 게재됐다. 논문명은 ‘When Copper Falls: Overriding the Irving-Williams Stability Trend through Outer-Sphere Hydrogen Bonding’이다.

AI 생성 연구 이미지(사진=KAIST)
AI 생성 연구 이미지(사진=KA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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